2019 밴쿠버 여행기 (5-9 Jun; 3박 5일)

여행의 이유


이번 여행은 아주 충동적으로 결정됐다. 때는 새로운 회사로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고 이직한지 반 년이 좀 넘었던 시점인 올 봄이었다. 불가해한 관행과 관습, 관성들로 가득찬 새 회사의 업무가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데다, 역시 어느 회사든 피해갈 수 없는 사람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어느날이었다.

마침 법정교육이 있어 회사 교육장에 앉아있었는데, 문득 창 밖으로 보이는 미세먼지 때문에 뿌연 하늘이 너무나도 처연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지금 내가 뭘 하고 있지’라는 회의감 가득한 시기였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러던 차에, 얼마 전에 만났던 몇 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아내와 밴쿠버로 간 대학 동기이자 입사 동기가 생각났다. 집안일 때문에 잠시 한국에 들어온 김에 만나 몇 번 밥을 같이 먹고 고민을 나누기도 했었는데, 최근 구입한 집에 있는 게스트룸을 내줄테니 밴쿠버로 놀러오라는 얘기를 여러 번 했었다.

교육장에 앉은 채 친구에게 밴쿠버에 놀러가도 되겠냐고 연락을 했다. 내가 밴쿠버에 가면 친구집에 며칠 얹혀지내는 것에 친구의 아내도 흔쾌히 동의해주었단다. 바로 밴쿠버행 항공권을 결제했다.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게 가능한 요즘 세상의 장점을 십분 활용한 셈이다.

그렇게 이번 여행은 충동적으로 결정됐다. 한국에서의 직장 생활에서 받고 있는 스트레스로부터 잠시 벗어나기 위한, 말 그대로의 도피성 여행이었다. 이 여행을 간다고 해서 내가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경감될 이유는 전혀 없다. 며칠 자리를 비울 뿐, 근본적인 환경이 바뀔리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때 당시에는 어떻게든 사무실 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만이 가득했다. 정말 필사적인 때였던 것 같다. 왕복에 걸리는 금전적, 시간적 비용에 비해 턱 없이 짧은 일정의 밴쿠버 여행은 그렇게 확정됐다.

여행 준비

항공권


항공권은 항공권 비교 사이트 두어 군데를 대충 검색해서 골랐다. 짧은 여행 일정을 최대한 활용하는 게 목적이다보니 직항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인천-밴쿠버간 직항 항공편은 대한항공과 에어캐나다에서 운항하고 있었다. 출발하는 날 휴가를 쓰지 않고 오전 근무만 한 후 오후에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는데, 에어캐나다보다 대한항공 쪽이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대처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에어캐나다 15:30, 대한항공 18:50)

숙소

하이시즌에 접어든 밴쿠버의 숙박비는 정말 비쌌다. 보통 숙박비로 하루 $100 정도를 기준으로 삼는데, 다운타운 쪽에 있는 호텔들은 대부분 $200 이상을 넘나들었다. $100 초반 정도에 맞추려면 랭글리, 코퀴틀럼, 리치먼드 같은 밴쿠버 광역권으로 나가야 했다.

다행히 이번 여행은 친구가 최근 구입한 콘도에 있는 게스트룸에 신세질 수 있었다. 덕분에 나중에 계산해보니 친구의 배려 덕에 상당한 여행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다.

여행 계획

이번 여행은 일정이 짧다보니 계획 역시 단순해질 수 밖에 없었다. 밴쿠버에서 좀 더 나가면 빅토리아, 휘슬러 같은 유명 관광지가 더 있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교통편은 차치하고서라도 시간이 없어 밴쿠버 도심 위주의 일정을 짤 수 밖에 없었다.

원래 여행 일정을 짜던 방법대로 처음 대강의 일정을 짰을 때는, 키칠라노에 있는 박물관들과 스탠리 파크에 있는 아쿠아리움에서 시간을 많이 보낼 계획이었다. 이후 친구의 조언을 거쳐 일정은 아래와 같이 조정됐다.

1일차

  • 오전: 밴쿠버 도착
  • 오후: 키칠라노 비치 – 그랜빌 아일랜드

2일차

  • 오전: 스탠리 파크
  • 오후: 다운타운 (잉글리시베이 비치, 차이나 타운, 가스타운 등)

3일차

  • 오전: 카필라노 서스펜션 브릿지 파크
  • 오후: 린 캐년 파크

4일차

  • 오전: 쇼핑
  • 오후: 출국

실제 여행에서는 쇼핑 욕구가 없어 4일차 오전이 휴식으로 대체된 것과, 저녁마다 친구가 웨스트밴쿠버와 딥 코브에 데려다준 것 말고는 계획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일정 자체는 꽤 만족스러웠다. 아쉬운 부분은, 밴쿠버 박물관을 못 간 덕에 밴쿠버의 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충분히 해소하지 못 했다는 것 정도다.

여행 비용

밴쿠버는 북미에서도 물가 비싸기로는 손꼽히는 도시다. 하지만, 여행자로서 잠시 머무르다 오는 입장에서는 한국 대비 그렇게까지 비싸다는 느낌은 받지 못 했다.

여행자로서 밴쿠버가 비싸다고 느낄 수 있는 건 숙박비와 교통비, 세금, 팁이다. 하이 시즌의 숙박비는 일 평균 $200를 쉬이 넘어간다. 하루 교통비를 DayPass로 해결한다고 보면, 내가 밴쿠버에 있을 당시 $10.25, 이 글을 쓰는 지금은 $10.50이니 대중교통만 타도 대충 하루 만 원씩이다. 소비세도 품목마다 차이가 있지만 한국보다 세율이 높고, 팁의 존재는 외식 물가를 더욱 올린다.

다만, 내 경우에는 숙박을 친구집에서 얹혀 지내는 걸로 해결하고, 하루 종일 걸어다니느라 식사도 대충 때운데다, 팁을 안 줘도 되는 상황이 대부분이었던 탓에 생각보다 지출이 적었다. 밴쿠버에 캐나다달러로 $300을 들고 갔는데, 특별히 돈을 아껴쓰지 않았음에도 3박 4일 동안 $120 남짓 밖에는 쓰지 못 했다. eTA 신청 수수료, 면세점에서 지출한 금액까지 모두 합쳐도 20만원이 채 안 됐다. 꽤 저렴하게 여행하고 온 셈이다.

그나마 가장 큰 지출은 카필라노 서스펜션 브릿지의 입장료였다. 비록 할인폭은 얼마 되지 않지만, 밴쿠버의 주요 관광지 입장료를 할인해주는 쿠폰이 있어 조금이나마 할인 받을 수 있었다.

여행 짐싸기



여행 짐 역시 평소 하던대로 준비했다. 원래는 20L 짜리 메신저백을 가지고 가려고 했는데, 게스트룸을 흔쾌히 내어 준 친구에게 전해줄 선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35L 백팩을 이용했다. 선물은 크기는 작았지만 액체류가 많아 따로 박스 포장해서 위탁 수화물로 보냈고, 그 외 짐들은 기내 반입했다.

위탁 수화물을 보내본 게 아주 오랜만이었다. 덕분에 인천에서 평소보다 수속에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캐나다 입국심사 줄이 워낙 길어, 위탁 수화물이 이미 나와 있어 짐 기다리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한국 돌아올 때는 모든 짐을 기내 반입해서, 빠르게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밴쿠버는 한국의 봄 날씨 정도에 비가 자주 온다는 이야기가 있어, 옷도 그에 맞게 준비했다. 일정이 3박 5일 밖에 안 되기에 속옷과 양말은 매일 갈아입을 수 있을 정도, 그 외 옷은 셔츠만 한 벌 더 여분으로 챙겼다. 여기에 보온 목적으로 메리노울 후드 집업, 방수 목적으로 얇은 윈드브레이커 재킷을 넣었다.

여행 일정 중 트래킹이 포함되어, 신발은 방수되는 경등산화를 신고 갔다. 비가 잦다보니 산길이 진흙탕이 된 구간도 있었는데, 제대로 된 신발을 신은 덕에 발 적실 일 없이 무사히 트래킹을 마칠 수 있었다. 친구네 집이 입식 생활일까봐 슬리퍼도 따로 챙겼는데 막상 가보니 한국처럼 좌식 생활로 꾸며져 있어 여행 내내 슬리퍼는 쓸모가 없었다.

여행 후기

캐나다 입국심사


캐나다를 비롯한 영미권 국가들의 입국심사는 악명 높다. 미국, 영국을 별 문제 없이 들락거린 경험이 있었지만 이번만은 좀 걱정이 됐다. 항상 왕복 항공권과 함께 준비했던 호텔 예약 영수증이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입국심사 때 친구집에서 지낼거라고 했더니 다양한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다행히 대답을 잘 했는지 서류 제시 요구 없이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밴쿠버

여행 일정이 짧아 밴쿠버의 많은 부분을 둘러보지는 못 했다. 다운타운과 키칠라노, 노스밴쿠버의 일부만을 본 정도였다.

짧은 견문에서 느껴진 건, 밴쿠버는 현대적으로 잘 꾸며진 시가지 바로 곁에 펼쳐진 광활하고 때묻지 않은 자연 환경이 장점인 도시인 것 같다. 특히 종일 흐리고 비가 와서 우울한 분위기의 겨울 대신, 화창하지만 덥지 않고 상쾌한 여름에 왔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낀 것 같다.


밴쿠버에서 가장 좋았던 곳은, 내 경우에는 린 캐년이었다. 평일 오후에 갔더니 인적이 드물어 한적한 가운데, 울창한 온대 우림 속에서 잘 정비된 산책로를 거니는 망중한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만약 다시 밴쿠버에 간다면 이번 여행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캐나다 서부의 산 속에서 산책하는데 할애하겠다며 굳게 마음 먹을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카필라노 서스펜션 브릿지 파크는 잘 꾸며놓았지만 역시 사람 손을 너무 많이 탄데다 관광객이 너무 많아 집중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스탠리 파크 역시 산과 바다, 도시를 한번에 즐길 수 있는 멋진 도심 공원이었지만 그 이상의 특별함은 느끼지 못 했다. 밴쿠버의 다운타운은 전형적인 북미 대도시다보니 내가 주로 관심을 갖는 역사성 같은 부분은 부족할 수 밖에 없는 곳이었다.

밴쿠버는 한국보다 꽤 고위도(북위 49도)에 위치한 곳이다. 그래서인지 한국보다도 해가 훨씬 길었고, 햇살도 훨씬 강하게 느껴졌다. 맑은 날은 물론이고, 흐린 날에도 선글라스를 쓰지 않으면 한국에 있을 때보다 눈에서 느껴지는 피로감이 더했다. 밴쿠버에는 편광 선글라스를 갖고 갔는데, 주로 수변에서 보냈던 시간이 길었다보니 효과가 좋았다.

밴쿠버는 북미 도시치고는 대중교통 시스템이 꽤 괜찮은 곳이었다. 데이패스 사용한다면 별 의미 없지만 무료 환승도 되고, 내가 가고 싶었던 목적지들을 대중교통만으로도 충분히 오갈 수 있었다. 버스나 전철 내부 역시 깔끔하고 청결하며 이용하기 쉬웠다.

밴쿠버는 상대적으로 아프리카계가 적은 대신, 아시아계 사람의 비율이 무척 높은 도시였다. 지금까지 여행 다니면서 노골적인 인종 차별을 당해본 적이 없긴 했지만, 밴쿠버에서 역시 짧은 체류기간 동안 별 다른 차별 받는다는 느낌 없이 즐겁게 여행할 수 있었다.

여행을 마치며


이번 밴쿠버 여행은 말 그대로 도피성 여행이었다. 밴쿠버에 갔다오고 나서도 한동안 업무적 압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아, 여전히 꽤 힘든 시기를 보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밴쿠버에서의 며칠은 일상으로부터 시공간적으로 확실히 분리되어, 그동안 지치고 찌든 머리와 마음에 확실한 휴식을 줄 수 있었던 시기였다. 특별한 결심이나 미래 계획을 세운 건 아니었다. 대신, 아무 생각 없이 서늘하고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바닷가를, 또 숲을 걷는 시간 자체가 좋았다.

특히 밴쿠버에서는 후각, 청각으로 느껴지는 자극이 기분 좋았다. 미세먼지 걱정 없이 깨끗한 공기가 그랬고, 머리에 쓴 윈드브레이커 후드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나 발 아래로 자갈이 밟히는 소리를 듣는 것 역시 그랬다. 내가 사는, 언제든 어디든 자동차와 사람으로 넘쳐나는 서울 도심에서는 느껴보기 힘든 순간이었다.

여기에, 역시 개인적으로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것도 기분 좋았다. 그동안 지내왔던 이야기들을 나눴던 시간이 즐거웠고, 집의 게스트룸을 기꺼히 내준 것이나 밴쿠버 여행에 대한 조언들, 맛있는 식당 소개, 내가 혼자라면 가보기 힘들었을 곳들에 자동차로 데려다준 것 모두가 고마웠다.


2019 캐나다 밴쿠버 여행


밴쿠버 여행 4일차 (8 Jun 2019, Sat): 밴쿠버-인천

친구집 @9:03

전날 음주량이 좀 과했던데다 늦게 잔 덕에 아침에 느지막히 일어나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오후 비행기인데다 오전에 다른 일정을 안 잡은 덕에 시간에는 여유가 있었다. 캐나다 올 때 내 짐의 1/3 정도를 차지했던 친구 선물이 가방에서 빠졌고, 대신 캐나다에서 산 게 아무것도 없다보니 가방에는 빈 공간이 많아 짐 싸기는 쉬웠다.

주말이라 출근을 안 하는 친구도 이내 일어나서 거실로 나왔다. 사이드 프로젝트로 무언가 진행하는 게 있다며 맥북을 꺼내 티켓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마침 거의 10년이 다 된 윈도우즈 랩탑을 맥북으로 바꿀지 말지 고민 중이던터라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결국 영업 당해버리고 말았다. 여행 복귀 후 얼마 되지 않아 맥북 프로를 구입했고, 지금 이 여행기도 맥북으로 쓰는 중이다.

공항 가는 길 @11:03


친구가 공항까지 데려다준다고 해서 같이 집을 나섰다. 공항까지만 가면 되니 자판기에서 신용카드로 싱글 티켓을 사서 시버스에 올랐다. 이후 캐나다 라인을 타고 공항으로 갔는데, 사람도 별로 없이 한산해서 별 불편함 없이 공항까지 갈 수 있었다.

내가 갖고 있던 컴퍼스 카드와 $180 정도의 현금은 친구에게 억지로 안겨줬다. 컴퍼스 카드는 워터프론트역이나 차이나타운에서 반납하고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데, 그러기가 애매했다. 매일 워터프론트역을 지나는 친구라면 보증금 환불 받든, 다른 용도로 사용하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현금은 생각보다 너무 많이 남았다. 입국심사 때 보유 현금을 물어볼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했고, 밴쿠버는 물가가 비싸니 하루 $100 정도 사용할 거라고 보고 $300을 환전해서 들고 왔는데, 절반도 채 쓰지 못 했다. 주로 걸어다녔던 탓에 교통비가 데이패스 본전도 못 뽑을 정도로 적게 들었고, 식사를 주로 푸드코트나 즉석식품으로 때운데다 생각보다 술을 희망사항만큼 많이 마시지 못했던 탓이다.

밴쿠버국제공항(Vancouver International Airport) @11:52

공항에 도착했다. 짐이래봤자 기내에 들고 탈 백팩 하나 뿐이니 체크인은 순식간에 끝났다. 이번 여행 내내 짐이 백팩 하나 뿐인걸 다들 신기해한다. 짐이 정말 그것 뿐이냐는 질문을 또 받았으니 말이다.


친구와 공항 Wendy’s에서 점심으로 햄버거를 같이 먹었다. 나는 ‘Dave’s Triple’을 주문했는데, 이름처럼 정말 패티가 세 장 들어있어 먹기 힘들 정도로 크기가 컸다. 맛 자체는 의외로 한국 패스트푸드와 크게 다를 게 없어서, 무난하다는 느낌이었다.

보안구역 앞에서 친구를 보내고 나는 에어사이드로 넘어왔다. 아내가 귀띔했던 것이 있어, 면세점에서 아이스와인과 메이플시럽을 샀다. 둘 다 밴쿠버 시내에서 샀으면 저렴했겠지만, 수화물을 위탁할 생각이 없었던 나에게는 액체류 기내 반입을 위해서는 공항 면세점 이외의 선택지가 없었다.


비행기 타기 전에 잠시 라운지에 들러 가볍게 요기를 했다. 비행기 타기까지 시간이 약간 남아있었는데, 마냥 라운지에만 앉아있기에는 시간이 아까워 공항 내부를 좀 돌아다녔다. 역시 입국 때 느꼈던 것처럼, 특히 흐르는 물과 자연을 소재로 꾸며진 내부가 편안한 인상을 주는 곳이었다.

KE072 기내 @14:38


인천에서처럼 장거리 비행을 위한 만반의 준비(안대, 목베개, 노이즈캔슬링 헤드폰, 메리노울 후드집업)를 하고서 비행기에 올랐다. 좌석에 준비된 물건들의 구성은 역시 올 때와 다를 게 없었다. (헤드폰, 베개, 물, 슬리퍼, 치약/칫솔 등)


인천에서 밴쿠버로 올 때는 늦은 오후에 출발해서 동쪽으로 가는 비행편이라 낮밤이 뚜렷해서 시차 적응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밴쿠버에서 인천으로 갈 때는 해를 따라 가는 낮 비행기이다보니 가는 내내 해가 지지 않았다. 한국에 도착하면 일요일 저녁이고, 바로 다음날 출근해야 하다보니 시차에 적응하려면 최대한 안 자고 버텨야만 했다.

KE072 기내 @15:40


기내식 서빙이 시작됐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특별기내식으로 과일식을 신청해두었다. 덕분에 밀타임 시작되자마자 가장 먼저 받아볼 수 있었다. 과일로만 되어 있다보니 먹을 떄나 소화시킬 때나 부담이 없었다.

KE072 기내 @19:47


14:40 출발하는 비행기였으니, 이제 5시간쯤 지났다. 딱 절반쯤 온 셈이다. 여전히 창 밖으로는 해가 보여서, 안 자고 버티는 데 도움이 됐다.

덥다 싶어 시계의 온도 센서를 보니 섭씨 22.8도란다. 분명 밴쿠버 올 때는 20도 정도에서도 추워서 후드를 뒤집어쓰고 담요를 덮어야 했는데, 지금은 후드를 벗고 셔츠 소매를 걷어올렸음에도 덥다고 느껴진다. 왜일까? 낮시간대 비행기라서?

여기저기서 라면 냄새가 난다. 런던에서 한국 돌아올 때도 그렇고, 유독 외국에서 한국 들어가는 비행기는 항상 라면 냄새가 진동을 한다. 다들 외국 음식을 버텨내기가 힘드셨던 모양이다. 먹어봐야 속만 부대끼고 전부 뱃살로 가는 컵라면에 무관심한 나로서는 좀 이해하기 어렵다.

인천국제공항 @18:03 (KST+1)

분명 10시간 짜리 비행인데, 토요일 이른 오후에 출발했는데 도착하니 일요일 저녁이다. 시차의 신비로움은 항상 체감할 때마다 할말을 잃게 만든다.

평소 하던대로 검역-입국심사-세관을 거쳐 나왔다. 이번에는 유독 빨라서, 비행기에서 내린 후 입국장 빠져나오기까지 10분도 채 안 걸렸다. 입국심사는 무인보다 유인이 오히려 더 빨랐고, 위탁수화물이 없으니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게 결정적이었다.

집 @19:20 (KST +1)

집이다. 내가 밴쿠버에 가 있는 동안 이탈리아에 있었던 아내는 나보다 몇 시간 먼저 귀국해서 집에 먼저 와있었다. 밴쿠버에 있는 동안 아침 저녁으로 친구가 잘 챙겨주었지만, 그래도 역시 집에서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아주 짧고도 밀도 높은 여행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3박 5일 일정이었는데, 실제로 순수히 여행에 주어진 시간은 이틀 + 한 나절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 중 하루는 밴쿠버 다운타운에, 하루는 노스밴쿠버에, 마지막 한 나절은 키칠라노와 그랜빌 아일랜드에 아주 알차게 썼다. 꼭 해야 할 것 위주로 아주 알차게 여행했다는 친구 아내의 평이 있기도 했다.

특히 아기자기한 도심과 광활한 대자연, 달콤한 날씨 아래서 재밌게 놀고, 맛있게 먹고 또 그동안 잊고 지냈던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2019 캐나다 밴쿠버 여행


런던 여행 8일차 (11th May 2019, Sat): 런던-인천


2019 런던 여행


Doubletree by Hilton Chelsea @7:56 (BST)

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챙겼다. 나와 아내 둘 다 영국 올 때보다 조금씩 짐이 늘었다. 나는 추위를 이기지 못 해서 구입한 바버 재킷 때문에, 아내는 포트넘&메이슨 등에서 구입한 선물들 때문이다. 다행히 둘 다 가방에 여유가 있어서, 짐 싸기 어렵지 않았다.

Peak Design Travel Backpack

여느 유럽 도시가 그렇듯이, 런던도 바퀴 달린 캐리어 가방으로 다니기 만만치 않아보였다. 다른 도시들의 장애물이 코블스톤이라면, 런던에서는 유독 좁은 인도와 튜브역을 오르내리는 수많은 계단이 캐리어 가방 사용을 힘들게 한다.

이번 여행에서는 짐가방으로 Peak Design의 Travel Backpack 45L, 보조가방으로 Peak Design의 Everyday Sling 5L를 각각 사용했다. 둘 다 몸에 잘 고정되어 기동성 있게 움직이기 좋고, 메고 벗기 편하고, 방수에 충실해서 비가 잦은 영국에서도 소지품을 잘 지켜줬다. 백팩은 대한항공과 영국항공 모두의 기내 반입 기준을 충족해서, 굳이 수화물 위탁할 필요가 없었다.

체크아웃 전 호텔 조식을 마지막으로 먹었다. 막날에서야 말로만 듣던 영국의 명물, 마마이트가 식당에 구비되어 있는 걸 발견했다. 호기심에 집어들어 식빵에 아주 얇게 발라 먹어봤다. 묘한 시큼함에 강렬한 단짠, 감칠맛이 몰려왔다. 익숙한 맛은 아니지만, 어울리는 음식에 곁들이면 맛을 더욱 돋구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Tesco Express, Imperial Wharf @8:54 (BST)

호텔에서 나와 바로 옆 테스코 익스프레스에 음료수를 사러 갔다. 사실 음료수가 꼭 필요한 건 아니었는데, 파운드화 잔돈이 어중간하게 남아있어 모두 털어내기 위함이었다. 치열한 고민 끝에 몇 가지 음료수를 조합해서 동전 하나 남기지 않고 파운드화를 깔끔하게 다 털어낼 수 있었다. (£2.47)

영국 히드로 국제공항 @10:18 (BST)

패딩턴 역을 떠나는 히드로 익스프레스 안에서

호텔 근처 임페리얼 워프역에서 튜브로 패딩턴역으로 와서, 히드로 익스프레스를 타니 순식간에 공항에 도착했다. 피카딜리선 타는 것보다 가격은 좀 비싸지만 역시 좌석이 편하고 넓고 조용해서 좋았다.

공항에서는 위탁할 수하물이 없다보니 줄 서지 않고 간편하게 셀프 체크인을 했다. 기계에서 인쇄되어 나온 항공권 재질이 너무 저렴해보여 공항에서의 재미가 좀 떨어지는 게 아쉬웠다.

바버 재킷 택스 리펀도 신청했다. 히드로 공항의 택스 리펀 창구가 줄이 긴 걸로 악명 높아서, 안 되면 에어 사이드에서 택스 리펀 신청할 생각이었는데, 막상 가보니 랜드 사이드에도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보다 먼저 온 중국 사람은 서류 작성을 안해놔서 담당자와 한참 실랑이 중이었는데, 나는 호텔에서 미리 서류 준비를 다 해온 덕에 금방 절차를 마칠 수 있었다.

택스 리펀을 현금으로 받으면 또 귀찮은 파운드화가 생기는데다 추가 수수료가 있어 신용카드로 신청했는데, 5월 11일에 신청한 택스 리펀이 6월 25일에 카드 일부 승인취소 형태로 완료됐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 처리는 정상적으로 되어 다행이다.

입국 때보다는 훨씬 간단한 보안 검색을 통과하고 출국장으로 들어서면 난민촌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공항 중 하나 답게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앉을 자리조차 잡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저런 가게들도 많았는데, 특히 해리포터 샵이 눈에 띄었다. 킹스크로스역에서 들렀던 9 3/4 정거장 샵과는 물건 구색이 미묘하게 달라서 또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위스키의 나라 답게 면세점에는 위스키가 아주 다양하게 갖춰져 있었다. 특히 처음 보는 위스키가 많아 눈 호강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BA 17 기내 @12:12 (BST)

오는 길은 대한항공 일등석이었는데 가는 길은 영국항공 이코노미석이다. 어마어마한 간극이 느껴진다. 대신, 영국항공 이코노미석은 마침 런던 착발 항공편에 대한 마일리지 발권 50% 할인이 있어 원월드 마일리지 이용해서 저렴하게 발권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말고 마스크를 당기세요

누가 영국항공 아니랄까봐, 기내 안내방송에 유명한 영국 배우들이 많이 나온다. 마이클 케인 경을 보고서는 너무 황송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재밌는 경험이었다.

승무원들은 대체로 연세 지긋한 분들이셨다. 한국 항공사 승무원들의 나긋나긋한 서비스도 좋지만, 무거운 짐을 번쩍번쩍 들어올리거나 기내 난동자를 제압할 수 있는 강인한 팔뚝을 가진 승무원 쪽이 왠지 좀 더 안심이 된다.

바로 뒷자리에는 한국 여자분 여럿이 탔는데, 비행기 타자마자부터 몇 시간 동안이나 쉬지 않고 수다를 떠는 통에 편안한 비행에 많은 방해가 됐다.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했다. 어쩜 저렇게 남의 얘기를 몇 시간 동안이나 쉬지 않고 할 수 있을까.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륙하자마자 음료 서비스가 먼저 시작됐다. 아내와 같이 영국 맥주를 외친 끝에 스코틀랜드 브루어리인 브류독(Brewdog)의 캔 맥주를 받을 수 있었다. 영국항공과 콜라보한 제품이었는데 ‘Transatalantic IPA’라니, 비록 인천 갈 때는 대서양을 건너지 않지만 네이밍 한 번 신박했다. 맛도 깔끔하고 좋았다.

BA 17 기내 @18:34 (BST)

이제 절반쯤 왔다. 아무래도 완전히 다리 뻗고 누울 수 있었던 일등석에 비하면 많이 불편하다. 그래도 기내식(토마토소스 파스타)가 영국 요리의 악명이 무색하게 꽤 괜찮았던데다 양도 다 먹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푸짐했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매그넘 초콜릿까지 나눠줬는데, 나는 안 먹었지만 아내 말로는 맛있었단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사방에서 라면 냄새가 진동한다. 대체 왜 기내에서 굳이 컵라면 서비스를 하는걸까. 나도 평소에는 라면 좋아하지만, 맵고 기름진 냄새를 맡으니 속이 메슥거렸다. 그렇게 푸짐한 기내식에 간식까지 먹고서 컵라면을 또 드시는 분들이 참 대단해보이기도 했다.

인천국제공항 @7:55 (KST+1)

드디어 한국에 도착했다. 위탁 수하물 없이 기내 수하물만으로 하는 여행의 장점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비행기에서 내려서부터 입국장을 나오는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여기에 한 번 맛들이고 나면 다시는 수하물을 위탁할 수 없게 된다.

일정이 생각보다 길지 않아 아주 밀도 높고 빡빡하게 다녀온 영국 여행이었다. 특히 영국 날씨를 만만히 보고 옷을 얇게 입고 갔다 제대로 감기가 들어 여행기간 내내 고생한데다 예상치 못한 큰 지출(바버 왁스재킷)이 생기기도 했다.

그래도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스톤헨지와 대영박물관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도시인 런던 시내를 걸어서 또 버스를 타고 돌아보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대도시의 독특함을 느껴볼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런던 여행 7일차 (10th May 2019, Fri): 사우스 켄싱턴(자연사/과학/V&A 박물관-하이드 파크)


2019 런던 여행


Doubletree by Hilton Chelsea @8:25 (BST)

런던 여행의 사실상 마지막 날이다. 다음날이면 오전 중에 짐 싸서 공항으로 가야한다. 바깥 날씨는 여전히 흐리다. 런던 온 이래 처음 며칠 빼면 맑은 날씨 본 때가 정말 손에 꼽는 것 같다.

호텔 조식을 매일 같이 먹다보니 물리는 느낌이 든다. 지금까지 여행이나 출장 다니면서도 호텔 조식에 만족해본 적은 몇 번 없긴 한데, 이번에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게다가 굳이 꼬박꼬박 챙겨먹었기까지 했으니 당연히 물릴만도 하다.

베이컨은 소금 뿌린 삼겹살 같아서, 기대했던 달콤한 훈연향을 느끼기 어려웠다. 소시지와 해시 브라운도 그저 그렇다. 그나마 시큼하고 달짝지근해서 어디에나 잘 어울리는 HP 소스를 곁들이니 먹을만 했지만, 대신 소스맛 밖에 나지 않았다는 게 함정. 버진 메리는 시큼하고 짭잘했다.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았다.

스탬퍼드 브릿지 앞 (Stamford Bridge) @9:56 (BST)

이날은 사우스켄싱턴에 나란히 위치한 박물관 세 곳에 가보기로 했다. 자연사 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 과학박물관(Science Museum),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Victoria and Albert Museum)이 그곳이다. 사실 하루에 다 보기는 힘든 곳이지만 여행 일정이 부족해서 약간 무리를 하기로 했다.

원래 목표는 오전에 자연사 박물관, 오후에 과학박물관, 저녁에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을 보는 것이었다. 매주 금요일마다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이 22시까지 연장 개관을 하기 때문에 잡은 일정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금요일 야간에는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의 극히 일부 전시관만 개방됐다. 홈페이지에도 지나가듯 언급되어 있었는데, 잘 못 보고 지나친 탓이었다.

호텔에서 나와 버스 타러 갔는데, Citymapper가 알려준 정류장이 마침 스탬퍼드 브릿지 바로 앞이었다. 전날 유로파리그 경기가 있었던 곳인데, 그래서인지 방송사에서 리포트를 녹화하는 모습도 보였다.

런던 와서 길 찾는 데는 구글맵과 Citymapper를 같이 사용하고 있다. 구글맵은 주로 식당 같은 장소에 대한 평이나 길 찾는 데 쓰고, Citymapper는 ‘여기에서 저기까지’ 가는 방법에 대한 안내를 받는 데 썼다.

특히 Citymapper는 튜브 공사 정보가 빠르게 반영되고, 탑승 중 목적지가 다가오면 미리 알림을 띄워주어 편했다. 실시간으로 GPS를 쓰니 배터리 소모가 컸지만 충분히 감수할만한 편리함이었다.

Natural History Museum (자연사 박물관) @10:20 (BST)

자연사 박물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아름다운 건물 외관이었다. 멀리서 본 자연사 박물관 건물은 마치 거대한 독일식 궁정 건물 같아보였다. 가까이 다가서면, 여러 동식물의 모습이 빼곡히 세공된 부조물이 눈에 띈다. 여느 장식 하나 허투로 만들어지지 않으면서도 건물의 목적을 뚜렷이 나타내는 점이 인상 깊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기부 창구를 지나 로비로 들어서면,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대왕고래(Blue whale)의 거대한 골격이 위압감과 함께 경의로움을 느끼게 했다. 로비 양측에는 마스토돈, 공룡 화석, 운석, 산호, 청새치 등 자연사 박물관에서 다루는 주제를 상징하면서도 흥미를 강하게 잡아끌 수 있는 전시물이 하이라이트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역사가 19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박물관이지만, 많은 전시물들이 21세기의 눈높이에 맞게 잘 관리되어 둘러보기 좋았다. 특히 공룡관은 마치 다크라이드를 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로 흥미로운 구성이었다. 일부 오래되어 보이는 전시관도 있었지만, 내용을 읽어보고 즐기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자연사 박물관이라는 공간 자체가 대부분의 성인에게는 흥미끌 만한 요소가 별로 없기는 하다. 대신 아이들이 보기에는 정말 구성이 잘 되어 있었고, 이런 전시물을 둘러보는 걸 좋아하는 나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날 자연사 박물관에서는 세 시간 정도 머물렀다. 이 정도 시간으로는 당연하게도 모든 전시실을 다 볼 수 없어서, 블루존 전부와 그린존, 레드존 전시 중 관심가는 곳 몇 군데를 꼽아서 둘러보는 선에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레드존은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로도 갈 수 있지만, 1층 Earth Hall에서 스테고사우루스 화석 옆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는 경로가 더 나은 것 같다. 체력을 아낄 수도 있고, 에스컬레이터가 관통해서 지나가는 구조물이 꽤나 멋지기 때문이다.

평일 오전에 방문했는데도 사람이 아주 많았다. 특히 아이들이 아주 많아서, 특히 공룡관 같은 곳은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아이들이다보니 시끄럽기도 해서, 시간을 들여 전시물을 깊이 감상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박물관은 규모가 크고 동선이 복잡해서 길을 헤매기 딱 좋은 구조다. 지도를 무료로 주면 좋겠는데, 지도나 가이드북은 유료인데다 한국어는 제공되지 않는다. 대신 홈페이지에서 제공되는 PDF 파일로 된 지도를 이용하면 그나마 편리하게 돌아다닐 수 있다.

The Kitchen @13:28 (BST)

점심은 자연사 박물관 1층의 키친에서 크림티 세트 2인분을 주문해서 먹었다. (£13.60) 대영박물관보다는 아주 약간 못하다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박물관 안에서 먹는 식사치고는 꽤나 만족스러웠다. 특히 영국에서 먹는 클로티드 크림의 맛이 신기하게 좋아서 크림티 먹는 재미가 있었다. 여기 말고도 박물관 안에는 간단한 식사나 간식을 파는 곳이 있어, 시간만 충분하다면 하루 종일 죽치고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과학박물관 (Science Museum) @14:21 (BST)

자연사박물관 바로 북쪽에 위치한 과학박물관은 이날 방문한 다른 박물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지 않았다. 대신, 전시물의 밀도가 굉장히 높아 제대로 둘러보려면 다른 박물관들 못지 않게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과학박물관 역시 1층(Ground Floor)에 방문자의 흥미를 끌기 좋은 상징적인 전시물들이 전진배치되어 있었다. 증기기관, 방직기, 애플 1, DNA 나선구조, 브롬톤 자전거 등 현대 과학기술 분야의 발견과 발명을 나타내는 다양한 전시물들, 그리고 우주 탐사에 실제로 사용되었던 장갑이나 우주선 모듈을 보다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된다.

산업혁명의 고향인 영국답게 산업혁명 시기의 전시물이 아주 훌륭했고, 합리주의 시대와 항공우주 분야의 전시 아주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인터액티브 프로그램도 꽤 많았는데, 특히 영어로 소통이 가능한 아이들에게 좋아보였다.

원래는 좀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정성껏 둘러보려고 했는데, 역시 오늘 일정이 너무 빡빡했던데다 자연사 박물관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써서 서둘러 나올 수 밖에 없었다. 특히 4층(Floor 3)의 시뮬레이터 체험을 못 해본 게 아쉽다.

엑시비션 로드 (Exhibition Road) @15:43

과학박물관과 V&A 박물관 사이 익시비션 로드 길가에 있는 벤치에 잠시 앉았다. 자연사 박물관 못지 않게 과학박물관에서도 많이 돌아다녔더니 다리에 피로가 쌓였다. 마침 날씨가 개어 하늘에서 해가 나기 시작했고, 길거리에서는 비누방울 거리공연도 한창이었다. 짧은 휴식이었지만 여유로운 오후였다.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Victoria and Albert Museum) @16:02

이날 V&A 박물관을 맨 마지막 방문지로 잡은 건 이유가 있었다. 매일 17:45까지 개관하지만 매주 금요일에는 22:00까지 개관한다는 안내를 V&A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봤기 때문이었다. 저녁을 좀 많이 늦게 먹는다면, 오후 늦게 방문해도 V&A 박물관을 둘러보기에 시간이 꽤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잘못된 생각이었다. 분명 V&A 박물관은 금요일에 22시까지 열긴 열었다. 단, 17:45면 지하, 1층, 그리고 3층 전시실 중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전시실을 닫아버린다. 상설전시를 제대로 보려면 금요일에도 17:45까지는 관람을 마쳐야 한다고 보는 게 맞겠다.

어쨌든 V&A 박물관은 생각보다 아주 거대한 곳이었다. 자연사 박물관과 과학박물관을 합쳐놓은 것 같은 크기였는데, 기나긴 회랑을 따라 지하(Floor -1)부터 5층(Floor 4)까지 다양한 연대와 분야에 걸친 엄청난 양의 전시물들이 있었다.

SOFT Brexit or HARD Brexit?

대영박물관에서 로마, 비잔틴, 중세 유물이 생각보다 적다고 생각했는데, 딱 그 시대의 각종 미술품들이 V&A 박물관에는 넘쳐났다. 엊그제 내셔널 갤러리에서 회화로 본 그 시대 그 장면들을 V&A 박물관에서는 조각과 직물, 건축물로 볼 수 있었다. 기념품 가게도 독특한 것이 많아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제대로 보려면 여기도 대영박물관 못지 않게 적어도 하루 이상을 온전히 투자해야만 할 것 같다. 그만큼 전시물이 많고, 또 꼼꼼하게 읽어볼만한 거리도 많았다. 개인적으로도 영국에 와서 본 박물관 중에서는 대영박물관만큼이나 V&A 박물관이 손에 꼽을만큼 좋았다.

어마어마한 양의 귀금속들

다만 방문 시간을 잘못 맞춰 보고 싶었던 전시관의 절반도 채 보지 못 했다. 지하층의 중세와 르네상스 미술품들, 1층의 주요 전시들, 3층의 어마무시한 양의 은세공품들을 보는 정도 밖에는 할 수 없었다.

V&A 박물관 역시 내부 구조가 복잡해서 지도 없이는 길 잃고 헤매기 딱 좋은 구조였다. 다행히 여기저기에 배치된 자원봉사자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셔서, 길 잃지 않고 무사히 잘 둘러보고 나올 수 있었다.

하이드 파크 (Hyde Park) @18:55

아쉬움을 뒤로 하고 V&A 박물관을 나왔다. 해가 많이 길어져서, 저녁이 되었는데도 아직 해가 훤했다. 런던에 온 이래 이날 오후가 가장 날씨가 좋아서 이대로 들어가기 아까워 바로 근처에 있는 하이드 파크로 걸어가서 산책을 하기로 했다.

금요일 저녁의 하이드 파크는 드문드문 인적이 있는 조용한 곳이었다. 일단 날씨가 정말 좋았고, 오래된 나무가 가득한 숲이 자연에 가깝게 아주 잘 꾸며져 있었다. 이런저런 동물들도 많이 보였고, 그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풀 향기, 꽃 향기가 그윽했다. 수시로 머리 위를 지나다니는 비행기만 아니면 망중한의 느낌도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이드 파크

잘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아내와 천천히 걸으며 런던 여행의 마지막날을 정리했다. 참 빠듯하고도 바쁘게 지내온 여행이었다. 아내는 연일 계속되는 강행군에 체력이 방전되어 힘들어했고, 나도 생각보다 추웠던 런던 날씨에 감기가 제대로 들어 꽤 고생을 많이 했었다. 여행의 마지막에나마 하이드 파크에서 숲과 물, 하늘을 보며 여유를 즐긴 건 정말 잘 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Memories of India Kensington @19:58 (BST)

런던에서 식당을 돌아다니며 독특하다고 생각했던 건, 세계 요리 전문점에 가면 대체로 그 나라 계통의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태리 식당에 가면 정말 남유럽계 사람들이 일하고 있었고, 인도 식당에 가면 역시 인도계 사람들이 서빙을 한다.

런던에서의 마지막 만찬은 인도 식당에서 하기로 했는데,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홀에서 바삐 돌아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인도계였다. 모두가 아주 쾌활하고 친절해서,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았다.

식당에서는 2인 메뉴(Menu for Two; Deluxe Platter)를 주문했다. 나중에 다 먹고보니 양이 어마어마해서, 둘이 아니라 셋이 먹어도 될 정도였다. 아주 배고픈 게 아니면 단품 조합으로 주문해도 될 것 같다.

가장 먼저 나오는 샐러드는 주로 오이에 고수 조합이었다. 나는 둘 다 좋아해서 에피타이저로서 아주 즐겁게 먹었다. 탄두리 치킨은 가슴살 부위였는데 보기보다 맵지 않고, 씹으면 안쪽에서 육즙이 터져나와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맛이었다.

토마토 기반의 양고기 커리는 이날 먹은 것 중에 가장 맛있었다. 양고기 특유의 냄새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쪽이 단순히 소스맛만 나는 게 아니라 다양한 맛과 복잡한 향을 즐길 수 있어 좋았다. 경단처럼 보이는 고기 덩어리는 좀 짜긴 했지만 다른 향신료향도 잘 배어 있어 밥이나 난에 곁들여먹으니 적당했다.

치킨 커리는 대체로 달짝지근하고 코코넛이 들어간 맛이 났다. 같이 들어간 야채에서는, 잘 우려낸 채수 같은 푸짐한 야채 특유의 감칠맛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밥와 난에 곁들여먹으니 정말 맛있었다.

밥은 인디카(안남미)였는데, 특유의 향과 날리는 느낌이 강했다. 역시 인디카 향에 거부감이 없다보니 맛있게 잘 먹었다. 인디카 향은 역시 한국 음식보다는 커리 같은 강렬하고 다양한 향신료가 가득한 동남아 음식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난도 쫄깃거리고 맛있었는데, 밥이 굉장히 많았던데 반해 난은 한 장 밖에 없어 좀 아쉬웠다.

다 먹고 나면 손 닦는 용도의 물수건과 후식 음료가 제공된다. 커피나 차 중에 선택할 수 있다. 이걸 마시고 있으면 오렌지 초콜릿이 또 나온다. 맛은 딱 제주 감귤 초콜릿이다. 정말이지, 먹거리가 끝도 없이 나와서 방심할 수 없었던 식사였다. (£49.95 + Service Charge 10%)

이날 식사에서 가지고 있던 파운드화 지폐를 남김 없이 다 쓸 수 있었다. 또 언제 영국에 올지 알 수 없는 시점에 남은 파운드화를 갖고 있기 싫었는데, 다행히 계산이 잘 맞아들었다. 다음날 남은 동전까지 깨끗하게 다 털어내고 깔끔하게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임페리얼워프역 (Imperial Wharf Station) @22:06

기나긴 식사를 마치고 호텔 근처로 돌아왔다. 금요일 밤이라 그런지 런던 시내는 늦은 시간임에도 행인도 많고 시끌시끌한 분위기였다.

호텔 바로 옆 Imperial Wharf역의 자동판매기에서 다음날 패딩턴역으로 가는 싱글 티켓을 신용카드로 샀다. 이날이 종이 위클리 트래블카드 유효기간 마지막날이어서 다음날 튜브 타려면 따로 티켓을 사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오이스터 카드를 사용하는 게 훨씬 저렴했다. 하지만, 바쁜 출국날 오이스터 카드 환불 받기도 귀찮았고, 환불 받은 파운드화 보증금 역시 처치곤란이라 그냥 싱글 티켓 끊는 쪽을 택했다. (£4.9 x 2명)

비용 결산

  • The Kitchen (Natural History Museum) £13.60
  • The Memories of India Kensington £55.00
  • TfL Single Journey Ticket £4.90 x 2명
  • 합계 £78.40

런던 여행 6일차 (9th May 2019, Thu): 웨스트민스터 (웨스트민스터 사원-IWM 처칠 워룸-옥스퍼드 서커스)


2019 런던 여행


DoubleTree by Hilton Chelsea @7:48 (BST)

호텔 창문으로 보이는 풀럼 지역의 아침

전날 비가 많이 왔었는데 이날 아침은 화창했다. 물론 이제 런던 날씨에도 조금씩 익숙해지던 터라, 언제든 거센 비바람이 불 수 있는 전제 하에 외출 준비를 했다. 방수 되는 가방과 신발, 이틀 전에 산 왁스 재킷을 챙겨입고 우산도 따로 챙겼다.

이날 오후에는 특히 비가 거세게 내렸고 바람도 많이 불었었다. 완전히 생쥐꼴이 된 사람들도 많이 봤는데, 나는 준비를 잘 했던 덕분에 발이 젖거나 추위에 떨지 않을 수 있었다.

런던 와서 걸린 감기는 아주 제대로여서, 약을 챙겨먹는 와중에도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았다. 특히 기침 때문에 밤새 잠을 잘 자지 못 했다. 그나마 전날 테스코 익스프레스에서 구입해서 쟁여놓은 생수 12병 덕분에 계속 물을 마시며 버틸 수 있었다. 나 뿐만 아니라 아내도 전날까지 워낙 많이 걸었다보니 힘들어했다.

그래서 이날 원래 계획대로라면 웨스트민스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후 숙소로 오는 길에 첼시에 있는 국립육군박물관(National Army Museum)에 들를 예정이었지만, 일정을 조정해서 국립육군박물관 대신 옥스퍼드 서커스에 잠시 들렀다 일찍 숙소로 돌아오기로 했다.

버스 타고 웨스트민스터 가는 길 @9:38 (BST)

계획대로라면 웨스트민스터 사원 입장 시작시간인 9시 전에 웨스트민스터에 도착했어야 했는데 출발이 늦었다. 나와 아내 둘 다 몸이 별로 좋지 못했던 탓이다.

종이 트래블카드가 계속 튜브 개찰구에서 인식이 안 된다. 덕분에 굳이 개찰구에 트래블카드를 인식시켜야 하는 튜브보다 기사에게 보여주면 그만인 버스를 더 선호하게 된다. 이날도 버스를 탔고, 윗층 덱 맨 앞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덕분에 가는 길에 런던의 평일 아침을 잘 둘러볼 수 있었다.

런던에 온 이래 적어도 도심에서는 오토바이를 거의 보지 못 했다. 대신 자전거가 정말 많았다. 대부분 헬멧을 쓰고, 교차로에서는 다들 수신호도 능숙하게들 했다. 자전거 중에서도 브롬톤이 꽤 많았는데, 다양한 마개조가 횡행하는 한국과는 달리 거의 순정 그대로 타는 걸로 보였다. 도로는 유독 폭이 좁아보였고, 로터리와 일방통행, 버스와 자전거 전용 신호 등도 자주 눈에 띄었다.

빅벤은 공사 중

원래 웨스트민스터에서 꼭 가봐야 할 곳 중 하나는 빅벤(Big Ben)이 딸린 웨스트민스터 궁전(Westminster Palace)다. 영국의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는 건물인데, 워낙 낡고 위험해 수 년 간에 걸친 공사가 진행 중이라 외부를 제대로 보기 어려웠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가는 길에 잠시 스쳐지나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의회가 열리지 않는 토요일에는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일부가 외부인에게 개방되는데, 이번 런던 방문 일정이 토요일에 들어와서 그 다음주 토요일에 나가는 일정이라 시간이 맞지 않아 방문을 못 했다. 특히 BBC PMQ(Prime Minister’s Questions)를 즐겨봤던 터라 그 현장을 직접 보고 싶었는데 보지 못해 아쉬웠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Westminster Abbey) @10:17 (BST)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입장 개시 전에 미리 도착해서 줄 서 있으려고 했는데, 조금 늦게 도착했더니 아주 긴 줄을 만났다. 소매치기가 많은지 대기열 근처에 주의 표시가 여기저기 서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고딕 양식의 건물 외장도 아주 멋져서, 줄 서 있다 경치에 정신 팔려 있다 보면 주머니를 털려도 쉬이 알아채기 어려울 것 같다.

줄 서 있는 동안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분명 아침에 나올 때는 화창했었는데, 역시 런던 날씨의 변덕스러움은 어디 가지 않는다. 우산 대신 재킷의 후드를 뒤집어쓰고 버티다 보니 어느새 입장할 수 있었다. 입장료는 2-for-1 바우처를 이용해 반값 할인을 받았다. (£23.00) 줄 서 있는 동안 바우처의 빈칸을 미리 채워두었더니 금새 처리가 됐다.

입장료에 포함된 멀티미디어 가이드는 한국어도 지원한다. 왠지 한국어 가이드 화자가 외국인인듯 특이한 억양이었다. 알아듣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 무엇보다 다른 곳들의 오디오 가이드와 마찬가지로 내용이 충실해서 마음에 들었다.

사원 내부는 사원 외부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고딕 양식의 아름다움을 한껏 만끽할 수 있는 구조였다. 여기에 다양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성화, 목조 구조물들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많았던 건 무덤이었다. 세인트폴 성당에도 무덤이 많았지만,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시선 가는 곳마다 무덤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잉글랜드 왕가의 무덤처럼 크고 넓은 자리를 차지한 것도 있었고, 성당 바닥에 박힌 묘석이 그간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취 덕에 닳고 닳아 거의 알아볼 수 없는 것들도 많았다.

그 중에서도, 굳이 멀티미디어 가이드의 도움을 빌리지 않더라도 아이작 뉴턴, 윌리엄 톰슨(캘빈 남작), 폴 디랙, 어니스트 러더퍼드, 조지프 톰슨, 마이클 패러데이, 제임스 맥스웰, 스티븐 호킹 등 물리학 거장들의 무덤 또는 명판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들의 업적 위에 현대 과학이 우뚝 서있듯, 그들이 묻힌 자리를 뒷세대 사람들이 찾아와 추모하며 영감과 동기부여를 받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은 전쟁 전몰자들의 이름을 눈에 잘 띄는 곳 여기저기에 많이 남기고 또 기려준다는 인상을 받았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웨스트민스터 내에서 유일하게 발에 밟히지 않는 장소로 알려진 무명 용사의 무덤 외에도, 참전 군인들을 기리기 위한 곳들이 꽤 눈에 자주 띄었다.

멀티미디어 가이드를 따라가는 투어는 한 시간 정도 걸렸다. 멀티미디어 가이드에 포함되지 않은 공간들을 추가로 둘러보는 시간과, 줄 서는 시간까지 총 두 시간 정도면 여유 있게 둘러볼 수 있을 것 같다.

투어 중에는 화장실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없으며,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그럼에도 카메라를 꺼내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동아시아계였는데, 왜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지 모르겠다.

Osteria dell’Angolo @12:45 (BST)

웨스트민스터역에서 마셤가(Marsham Street)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찾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구글맵이나 트립어드바이저 등에서 보기로는 가격이 꽤 비싸지만 돈값하는 곳이라고 했는데, 먹어보니 틀린 평이 아니었다.

식전빵이 꽤 넉넉하게 나왔는데, 같이 나온 올리브 오일의 질이 아주 좋아서 기대가 더욱 높아졌다. 이어 나온 파스타들도 아주 훌륭했다. 메뉴판이나 영수증 사진을 찍어두지 않아 정확한 메뉴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토마토와 치즈의 강렬한 맛이 휘몰아쳐서 강렬한 감칠맛을 혀에 남겼다. 파스타는 핸드메이드로 만든다고 했는데, 노른자로 반죽한 생면 특유의 맛과 식감을 한껏 즐길 수 있었다. (£32.51, Service Charge 12.5% 포함)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 처칠의 전시내각 박물관 (IWM Churchill War Rooms) @13:51 (BST)

점심 식사 후, IWM 처칠 워룸으로 향했다. 식사하러 남쪽으로 꽤나 내려왔는데, 처칠 워룸은 웨스트민스터 사원 근처라 다시 북쪽으로 걸어 올라가야 했다.

런던에서는 방수가 정말 절실하다

점심 먹는 동안 반짝 맑았던 날씨가 다시 험악해지며 비를 어마어마하게 쏟아냈다. 처칠 워룸 앞에 길게 늘어선 입장 대기줄 때문에 비를 쫄딱 맞으며 기다려야만 했다. 그나마 작은 우산과 방수되는 외투, 가방, 신발을 잘 챙겼던 덕분에 큰 불쾌함 없이 기다림의 시간을 젖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다.

처칠 워룸에서도 2-for-1 바우처를 사용해서 한 명치 입장료로 두 명이 입장할 수 있었다. (£22.00) 입장료에는 오디오 가이드 포함되어 있다. 다만 한국어는 지원되지 않는다. 대신 영어 가이드를 들었는데, 비교적 느리고 또박또박하게 읽어주어 알아듣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각 전시물마다 설명도 충실히 붙어있었다. 간단한 요약을 보고 싶을 때는 전시물의 설명을,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을 때는 오디오 가이드를 주의 깊게 들어보는 쪽이 도움이 됐다.

전시물은 2차대전사 또는 윈스턴 처칠 개인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아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 윈스턴 처칠 개인에 대한 내용도 아주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었고, 2차 대전기 중 실제 영국 전쟁 내각의 다양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오디오 가이드를 적당히 들어가며 둘러보는데는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아내가 많이 힘들어해서 조금 서둘러 나왔는데, 오디오 가이드의 내용을 모두 들어가며 충분히 또 꼼꼼히 즐기려면 두세 시간 이상 잡아야 할 것 같다. 윈스턴 처칠에 관심이 있다면 영상이나 연설 등을 듣는데 시간이 훨씬 더 많이 걸릴 수도 있겠다.

옥스퍼드 서커스 (Oxford Circus) @15:52 (BST)

처칠 워룸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옅게 흩날리고 있었다. 우산을 쓰기도, 안 쓰기도 애매한 그런 날씨였다.

원래는 국립육군박물관(National Army Museum)에 갈 예정이었지만, 나는 감기가 심했고 아내는 체력이 방전되어 오늘의 박물관 투어는 여기까지만 진행하기로 했다. 대신, 길거리나 가게들을 가볍게 둘러보고 저녁도 먹을 요량으로 버스를 타고 옥스퍼드 서커스로 갔다.

날씨가 꽤 궂은데도 옥스퍼드 서커스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런던에서도 손꼽히는 번화가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을만큼 번화하고 다양한 상점들이 성업 중이었다. 뉴욕 타임스퀘어의 전광판만큼 유명한 옥스퍼드 서커스의 전광판 역시 이날 또 구경할 수 있었다.

한참 거리를 둘러보다 셀프릿지스 런던(Selfridges London)에 들어갔다. 런던에서도 손꼽히는 백화점 중 하나라고 하는데, 하이엔드 브랜드 가게들이 많았다. 중국인과 한국인이 많이 보였는데, 다들 커다란 쇼핑백을 대여섯개씩 팔에 걸고 다니는 점이 신기했다.

쇼윈도도 단순히 상품만 진열해둔 게 아니라 좀 더 명확한 주제를 표현하고 있었다. 특히 팻맥그라스랩(PAT McGRATH LABS)의 마치 철왕좌처럼 생긴 네온 장식물이 눈길을 끌었다.

Windmill Mayfair @17:07 (BST)

옥스퍼드 서커스에서 조금 걸어, 파이가 유명하다는 영국식 펍에 왔다. 런던에 왔으면서도 정작 펍에서 제대로 식사를 해본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그 전에 시도를 안 해본 건 아닌데, 보통의 음식점들과는 이용 방법이 다른데 따로 안내가 없다보니 그냥 헤매다 나오고 말았었다. 막상 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데 말이다.

가게에 들어가서, 가능하다면 빈 테이블 하나를 잡아놓고, 다양한 맥주 탭이 늘어선 카운터에서 메뉴판을 보고 바텐더에게 주문하고 바로 계산하면 그만이다. 테이블을 잡은 경우, 어느 테이블인지를 주문할 때 따로 알려주면 된다. 맥주는 카운터에서 바로 받아오면 되고, 음식은 준비되면 테이블로 서빙해준다.

주문은 섀퍼드 파이(Shepherd’s pie), 스테이크 버섯 파이(Steak and mushroom pie), 그리고 IPA 두 잔으로 했다. (£42.00) 맥주는 탭에서 따라준 걸 바로 받아왔고, 파이는 사이드, 소스와 함께 테이블로 따로 서빙됐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드문드문 빈 자리가 있었는데, 파이를 서빙 받을 때 쯤에는 실내가 사람으로 꽉 차서 아주 시끌시끌해졌다. 가게 안팎에 선 채로 맥주 마시는 사람들도 많았다. 영국식 펍이 이런 분위기이구나 싶어 아주 재미있었다. 이 와중에 실내는 금연이라 담배 피우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 역시 마음에 들었다.

섀퍼드 파이는 양고기였는데, 아주 고소한 맛이 아주 좋았다. 양 냄새는 약간 있었지만, 나는 양 냄새가 너무 없으면 서운하게 느껴는 터라 오히려 반가웠다. 스테이크 버섯 파이는 패스트리 안에 넣어 익힌 장조림 같은 맛이었다. 베이스로 와인이 들어간듯 조금 시큼한 느낌도 있었다. 각각 양 냄새와 시큼함에 너무 예민하지 않다면 한국 사람 입맛에도 무난할 것 같다. 파이 하나의 양은 성인 남성 한 명이 딱 적당히 먹을 정도였다.

사이드로는 칩스와 그레이비 소스가 나왔는데, 이 그레이비 소스가 아주 좋았다. 케첩과 브라운 소스도 같이 나왔었는데, 그레이비 소스가 워낙 좋다보니 손이 잘 가질 않았다. 여기에 탭 IPA까지 곁들여지니 아주 꿀맛 같은 저녁을 즐길 수 있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18:36 (BST)

기분 좋게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이다. 이번에도 종이 트래블카드 인식 문제가 번거로워 일부러 튜브 대신 버스를 탔다. 한창 퇴근 시간대라 길이 꽤 막혔다. 그래도 가능하면 버스 타는 게 더 좋은 것 같다. 밖이 보이고, 셀룰러 데이터가 비교적 잘 터진다.

호텔에 가까워지니 불을 훤히 밝힌 펍 몇 개가 눈에 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날 스탬포드 브리지에서 첼시와 독일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Eintracht Frankfurt) 간의 유로파리그 4강 경기가 있었다. 어쩐지 동네 골목마다 첼시 유니폼 입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펍에는 ‘Chelsea Fans Only’라고 써붙여놓기도 했더라니. 내가 첼시 팬이었으면 어떻게든 경기를 보려고 동분서주했을텐데, 축구에 관심 없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비용 결산

  • 웨스트민스터 사원 £23.00 (2-for-1)
  • Osteria dell’Angolo £32.51
  • IWM 처칠 워룸 £22.00 (2-for-1)
  • Windmill Mayfair £42.00
  • 합계 £119.51

런던 여행 5일차 (8th May 2019, Wed): 내셔널 갤러리-레스터 스퀘어-소호


2019 런던 여행


DoubleTree by Hilton Chelsea @7:56 (BST)

전날 대영박물관에서 하루 종일 걸어다닌 여파에 더 심해진 감기가 겹쳐 제대로 씻지도 않고 침대에서 기절해버렸다. 그러고 새벽에 일어났더니 당연하게도 감기가 더 심해졌다. 목이 심하게 부어서 말을 하거나 침을 삼키기 힘들고, 코에서는 누런 콧물이 수도꼭지 연 것처럼 줄줄 흐른다. 덕분에 호텔 조식도 과일 위주로 간단히 챙겨먹었다.

해열진통제 중 염증 없을 때는 아세트아미노펜, 염증 있을 때는 이부프로펜

더 이상은 약 안 먹고 버틸 수가 없어 아내에게 이부프로펜을 좀 사와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호텔 근처 테스코 익스프레스에서 뉴로펜(Nurofen)을 찾을 수 있었단다. 이부프로펜 200mg 짜리 당의정 16개에 £2.20이었는데,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포함된 설명서를 잘 읽어본 후 첫날은 매 끼니마다 두 알씩, 이후에는 끼니마다 한 알씩 챙겨먹었다. 다행히 약이 잘 들어 몸이 점점 나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트라팔가 광장 가는 버스 @9:24 (BST)

호텔에서 나오니 비가 한창 쏟아졌다. 그런데도 우산 쓴 사람보다 그냥 맞고 가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워낙 비가 잦으니 현지인들도 그냥 체념하고 다니는 것 아닐까. 바스-스톤헨지 투어를 안내해준 가이드도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나도 우산 대신 그냥 전날 산 바버 왁스재킷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다행히 제 역할을 잘 해서, 비바람을 완벽히 막아줬다. 어깨에 맨 가방과 신발도 방수가 되는 것으로 챙겼더니 걱정 없었다.

옥스퍼드 서커스 가는 22번 버스

비 오는 날 2층 버스 앞자리는 정말 의미 없다. 와이퍼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아무것도 안 보인다. 그나마 옆유리로 보이는 런던의 아침 풍경을 열심히 바라봤다. 런던의 도로는 참 좁아서, 예전 마차 다니던 길 그대로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 @10:18 (BST)

원래는 트라팔가 광장에서 잠시 시간을 보낼 생각도 있었지만, 감기 때문에 일정이 조금 지체된데다 비바람이 거세게 불어 바로 내셔널 갤러리로 들어갔다. 정문보다 솔즈버리 분관(Salisbury Wing) 쪽 입구로 들어가는 쪽이 연대순으로 감상하기 좋다고 해서 그리로 들어갔다.

역시나 입구에서는 짐 검사가 있었다. 특히 가방 크기 제한이 있었는데, 45 x 25 x 25 cm였다. 커다란 캐리어 가방은 반입하기 어렵고 맡겨 놓을 곳도 마땅치 않으니 아예 가지고 오지 않는 쪽이 좋겠다. 지하에는 무조건 외투를 맡겨둘 수 있는 클록룸이 있었다. 내셔널 갤러리를 제대로 보려고 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많이 걸어야 하니 최대한 몸을 가볍게 만드는 게 좋겠다.

내부 구조가 아주 복잡하다. 회랑과 통로가 여기저기 얽혀있어 지도를 보고도 길 찾기가 쉽지 않았다. 지도는 유료(£2)로 판매되므로, 미리 인터넷에서 확인 가능한 PDF 지도를 참고하는 쪽이 경제적이겠다.

한국어 지원 오디오 가이드는 유료(£5.00)로 대여할 수 있었다.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는 영어에 비하면 해설을 지원하는 작품 수가 아주 부족하다. 영어 해설도 속도나 발음이 알아듣기 어렵지 않았지만, 이날 시간이 부족해서 해설을 많이 듣지는 못 했다.

미술에는 별 조예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내셔널 갤러리에서의 그림 구경은 재밌었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의 성화들에 흥미가 갔다. 그림의 주제로 제시된 성경의 사건들, 그 속에 화가가 숨겨놓은 의미들을 찾아보는 과정이 특히 즐거웠다. 기독교도는 아니지만 성경 자체는 유대 민족 신화의 알레고리이자 서양 문화의 원천으로서 여러번 읽었는데, 그때 얻은 배경 지식이 많은 도움이 됐다.

오전 10시쯤 들어간 내셔널 갤러리에서 그림 보는 데 정신이 팔려있다 보니 어느새 오후 4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점심도 굶어가며 열심히 봤지만 결국 모든 그림을 다 보지는 못 했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 이후의 그림은 주요 작품에만 선택과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여느 대형 미술관이 으레 그렇듯, 여기도 그림을 마음껏 보려면 적어도 이틀은 필요할 것 같다.

오전에는 비가 워낙 많이 와서 제대로 못 봤던 트라팔가 광장을 내셔널 갤러리 본관 2층에서 이어지는 주랑 현관에서 내려다봤다. 어느새 비가 잦아들고 군데군데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트라팔가 광장을 약간 높은 곳에서 조망하기 괜찮은 장소였다.

Poppie’s Fish & Chips, Soho @17:18 (BST)

내셔널 갤러리에서 북쪽으로 두 블럭 정도 걸어, 소호에 있는 피쉬앤칩스 가게에 저녁을 먹으러 왔다. 아내가 찾아놨던 가게인데, 1952년부터 영업한 곳이고 상도 받았다고 입구에 적혀있었다. 한국인들에게도 꽤 유명한 곳인 모양이다. 자리 잡고 앉아있는 동안 현지인보다 한국인을 더 많이 본 것 같다.

가게 내부는 편안한 분위기로, 60-70년대 영국 락 카페처럼 꾸며져 있었다. 좌석은 넓지 않은 편이지만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스탭들은 징 박힌 가죽옷을 차려입었는데, 아주 유쾌해서 즐겁게 대화할 수 있었다. (게이 코드 아닌가?) 구글 리뷰에서는 인종 차별을 느꼈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나는 딱히 그런 부분은 느끼지 못 했었다.

먼저 맥주를 주문해서 마셨다. Campdon Pale Ale(£4.65)은 도수만 두 자리에 미치지 못한다 뿐이지 홉향이 싱그럽고 강해서 IPA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시원하고 상쾌한 맥주였다.

음식은 피쉬앤칩스 해덕 레귤러(Traditional Fish & Chips, Haddock, Regular £13.95), 칼라마리 링(Calamari Rings, £12.90)을 주문했다. 음식 하나에 한국 돈으로 1만원 중반대니 가격은 꽤 부담스럽다. 여기에 서비스 차지 15%가 또 추가되니 더욱 그렇다.

피쉬앤칩스는 레귤러 사이즈도 양이 어마어마했다. 해덕은 필렛 두 조각을 튀겨냈는데, 겉은 아주 바삭해서 씹는 식감이 좋았다. 속은 퍽퍽하지 않고 부드러워 무난히 먹을 수 있었다. 생선튀김이지만 기름 처리를 잘 했는지 눅눅하거나 쩐내 없이 깔끔했다.

칩스는 피쉬보다 더 인상 깊었다. 한국의 패스트푸드점에서 보던 얇은 감자튀김이 아니라, 엄지손가락만큼 큼직하게 조각내어 튀겨냈다. 겉은 피쉬처럼 바삭한데, 속이 아주 크리미해서 칩스만 먹든 다른 소스와 곁들여 먹든 아주 잘 어울렸다.

칼라마리는 한국에서도 많이 먹던 오징어 튀김 같았다. 튀김옷이 아주 얇고 크리스피한 게 독특했다. 맥주와 곁들여 먹는 술 안주로 괜찮았다.

레스터 스퀘어(Leicester Square)-피카딜리 서커스(Piccadilly Circus) @18:26 (BST)

저녁을 배불리 먹고 레스터 스퀘어에서 피카딜리 서커스로 이어지는 영국의 번화가를 걸었다. 이른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도 많고 가게들도 모두 성업 중이었다.

먼저 간 곳은 레스터 스퀘어에 있는 레고스토어였다. 레고 주제의 유튜브 채널에서 본 적 있는 곳이었는데, 실제로 가보니 그리 넓지는 않았다. 대신 사람은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대체로 정신 없는 분위기였다. 1-2층에 걸쳐 있는 레고 빅벤이나 벽을 장식한 레고 런던 디오라마가 눈길을 끌었다.

레고스토어 바로 옆의 TWG 역시 아주 붐볐다. 차 종류가 어마어마하게 다양했고 또 대부분의 차들을 시향해볼 수 있어서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틴캔도 예뻐서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함을 느낄 수 있었다.

BBC 드라마 셜록의 오프닝으로 익숙한 피카딜리 서커스의 피카딜리 라이트를 지나, 포트넘&메이슨에 들렀다. 금방 들렀던 TWG도 차의 가짓수가 많다 싶었는데, 포트넘&메이슨은 다류가 비치된 1층만으로도 TWG보다 규모가 크고 종류도 더 많아보였다. 분위기도 좀 더 고급진 느낌이었다.

“TEA, GLORIOUS TEA!”

한국 사람이 아주 많아서, 수트를 잘 차려입은 점원들이 아니었으면 여기가 런던인지 서울인지 알아보기 힘들었을 것 같다. 다들 바구니 싸가는 분위기였는데, 아내도 선물할 차와 쿠키를 여기서 조금씩 샀다. 포장이 고급져서 확실히 선물용으로 좋아보인다. 나도 다구의 예쁨에 홀려 하마터면 충동구매할뻔 했지만, 겨우 돌아설 수 있었다.

Doubletree by Hilton Chelsea @20:42 (BST)

쇼핑한 물건들을 바리바리 짊어지고 호텔로 돌아왔다. 해가 워낙 길다보니 서머타임 중 저녁 9시가 다 됐는데도 아직 해가 다 넘어가지 않았다.

종일 비가 오락가락했던 하루였다. 런던에서는 그냥 언제든 비가 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쪽이 안전할 것 같다.

이날 밥도 거르고 내셔널 갤러리에서 하루 종일 서 있었던 덕에 역시 체력 소모가 컸다. 며칠째 휴식 없이 강행군 중이라 이후 일정은 너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조정해야 겠다.

비용 결산

  • Nurofen 200mg 16 tablets (Tesco Express) £2.20
  • National Gallery, Audio Guide £5.00
  • Poppie’s Fish & Chips £41.23 (Service Charge 15% 포함)
  • 합계 £48.43

런던 여행 4일차 (7th May 2019, Tue): 대영박물관-영국도서관-킹스크로스역


2019 런던 여행


디스트릭트선 (District Line) @09:34 (BST)

런던에 온 이후 계속 추위에 떨며 다녔더니 감기가 너무 심했다. 결국 아침 10시에 여는 대영박물관으로 가기 전에, 전날 공휴일이라 못 갔던 리든홀 마켓(Leadenhall Market)의 바버(Barbour)에 가서 비바람을 제대로 막을 수 있는 옷을 한 벌 사기로 했다.

공휴일 지난 후 첫 평일 아침이라 그런지 튜브가 많이 붐볐다. 러시아워의 전철이 미어터지는건 서울과 런던이 다를 게 없었다. 특히 오버그라운드역에서는 사람이 너무 많아 처음 온 차는 타지 못 했고, 다음 차도 유지보수 때문에 운휴되어 일정이 더 늦어졌다.

리든홀 마켓 (Leadenhall Market) @10:22 (BST)

리든홀 마켓 바버 매장

전날 코번트 가든에서는 맞는 사이즈가 없어서 사지 못 했던 바버 왁스재킷을 리든홀 마켓 바버에서 구입했다. 역시 한국인 직원은 없었지만 점원들이 아주 친절해서 기분 좋았다. 바버 옷은 참 예쁜데 비싸고, 비싼데 예쁜 것 같다. (£228.00) 택스 리펀이 가능해서 필요한 서류를 발급 받았고, 귀국 때 히드로 공항에서 신청한 후 두 달 만에 리펀을 받을 수 있었다.

구입한 옷은 비 올 때 쓸 수 있는 후드가 달린 비데일 라이트웨이트(Bedale Lightweight) 모델이다. 키 178cm의 마른 체형이 입기에는 M사이즈가 가장 좋았는데, 몸통 품이나 기장은 적당한 대신 서양 의류가 으레 그렇듯 소매가 손등을 거의 다 덮을 정도로 길었다. 왁스를 덜 먹인 대신 가벼운 모델로 골랐는데, 방수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무게도 그렇게 가볍다는 느낌은 받지 못 했다.

아내도 바버 재킷의 디자인과 색상은 마음에 들었던 것 같은데, 왁스재킷 특유의 촉감이 싫다고 구입하지 않았다. 확실히 미묘한 촉감이다. 여기에 주기적으로 리왁싱도 해줘야 하고, 보관에도 신경 써야 하니 가볍게 살 수 있는 옷은 아닌 것 같다.

대영박물관 가는 길 @10:24 (BST)

2층 버스에서 내려다 본 런던 도심

역시 평일 답게 사람이 북적거린다. 전날 Bank holiday의 황량했던 모습과 너무 큰 차이라 신기했다. 도로에는 자전거도 많은데, 브롬톤의 고향 답게 자전거 중 1/5 정도는 브롬톤인 것 같았다. 특히 다채로운 색상의 프레임을 섞은 믹스톤이 많고, 거의 빠짐 없이 헬멧을 쓰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 @10:59 (BST)

대영박물관 앞에 도착하자 짐검사 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런던의 여느 유명 관광지가 그렇듯 무기류나 캐리어 가방은 반입이 안 되니 주의하자. 짐 검사를 마치면 도네이션 해달라는 봉사자들과의 1:1 면담이 기다리고 있다. 남의 유물 뜯어다 전시하면서 도네이션 받는 것도 양심 없다고 생각하지만, 정 유물 관리에 기여하고 싶으면 박물관 내에도 도네이션 할 수 있는 곳이 많으니 여기는 가볍게 지나쳐도 좋다.

대영박물관 Great court
오디오 가이드; 다들 대영박물관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영국박물관

입장하자마자 바로 중앙의 Great Court로 가서 오디오 가이드를 빌렸다. (£7.00) 대한항공에서 오디오 가이드 제작을 후원한 덕에 스카이패스 회원권이 있으면 할인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봤었는데, 막상 가보니 할인해주지 않았다. 오디오 가이드는 일부 유물에 한해 설명이 제공되었지만, 그 정도만 해도 많은 도움이 됐다.

본격적으로 둘러보기 전에 먼저 이른 점심을 먹었다. Great Court 한켠에 식음료를 파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 크림티 세트를 주문했다. (£5.50 x2) 근데 이게 아주 꿀맛이었다. 스콘, 클로티드 크림, 홍차로 구성된 세트인데 있을 건 다 있는데다 꽤나 든든하기까지 하다. 가격도 대영박물관 Great Court에서 먹는 것치고 저렴하게 느껴졌다.

대영박물관은 내부 구조가 무척 복잡해서 동선 짜기가 쉽지 않았다. 사람도 많고 유물도 많아 자칫 길 잃기 십상이다. Floor Plan을 잘 보고 돌아다니는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무거운 짐이나 옷도 Cloakroom(유료)에 맡겨두고 최대한 가볍게 움직이는 게 좋겠다. 박물관 여기저기에 비치되어 무료로 이용 가능한 접이식 스툴은 가끔 앉을 때 편하긴 하겠지만 들고 다니기에는 꽤 묵직해서 체력 안배에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대영박물관을 둘러보다 보면 전시물의 높은 수준과 아름다움, 어마어마한 양에 반함과 동시에 끈질긴 약탈혼에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로제타석이나 이집트 미라 실물, 이스터섬 석상을 파내오거나 아시리아 궁전 벽체나 파르테논 신전의 부조물을 통째로 뜯어와 전시할 정도다.

양적으로도 어마어마해서, 이날 6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유물만 보고 다녔지만 전체 전시실 중 절반도 채 못 봤을 정도였다.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에서 평생 볼 세발솥을 다 봤듯, 대영박물관에서는 평생 볼 그리스 도기를 다 보고 온 것 같다. 한나절로는 하이라이트 유물만 겨우 둘러볼 수 있을 것 같고, 제대로 보려면 적어도 이틀 이상은 잡아야 할 것 같다.

어려서부터 이렇게 다양한 문화권의 수준 높은 예술품을 보며 자라날 영국의 아이들이 부럽기도 하고, 오직 대영박물관을 다 둘러보기 위해서라도 런던에 한 번 더 와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도, 다른 나라에서 뜯어온 유물로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입장이니 무료 입장은 혜택이 아니라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생각도 동시에 드는, 복잡한 감상이 든 곳이었다.

영국도서관 (British Library) @17:29 (BST)

대영박물관에서 나와, 그리 멀지 않은 영국도서관으로 갔다. 도서관 역시 처음 입장할 때 짐 검사가 있었다. 실제로 테러를 여러 번 겪었기 때문이겠지만 꽤 철저하다는 생각을 했다.

도서실에 들어가려면 신분증(여권도 가능)을 이용해 등록해야 하고, 들어갈 때도 아주 까다로운 규정을 지켜야 한다. 카를 마르크스의 영국 망명 시절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이 바로 영국도서관 도서실이어서 관심이 있었는데, 마르스크가 머물렀던 그 공간은 현재의 영국도서관이 아니라 대영박물관의 Great Court다보니 굳이 도서실에는 들어가보지 않았다.

전시실(Treasure Gallery)은 그런 번거로운 절차 없이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영국도서관에 방문한 목적 역시 전시실이다. 1215년 잉글랜드의 존 왕에 의해 서명된 이래 사실상 영국의 헌법이자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 마그나 카르타는 현재까지 4부의 원본이 남아있는데, 그 중 2부가 영국도서관에 있기 때문이다.

전시실 안쪽에 별도로 마련된 공간에 마그나 카르타가 전시되어 있었다. 사실 중세 영어로 적힌데다 세월이 흐르면서 글씨가 희미해져 문서에서 완전한 문장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았지만, 직접 본 것만으로도 묘한 만족감이 있었다. 바로 근처에 마련된 다양한 멀티미디어 매체를 이용해 마그나 카르타의 주요 내용과 영향에 대한 설명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전시실에는 마그나 카르타 뿐만 아니라 다른 귀중한 판본들이 많았다. <로빈슨 크루소>나 <레비아탄> 초판본, 간디가 인도 부왕에게 보낸 편지, 아일랜드 부활절 봉기 당시 보고서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종의 기원>도 있다고 들었는데 전시실에서 찾지는 못했다.

전시실 내부는 유독 어둡고 서늘한데다 조용하기까지 하다. 귀중한 판본을 보존하기 위해 플래시 사용 여부와 상관 없이 사진 촬영도 금지다. 스마트폰을 꺼내들면 어디선가 직원이 나타나서 제지한다. 하지 말라면 좀 하지 말자.

킹스크로스역(Kings Cross Station) @18:24 (BST)

영국도서관 전시실을 둘러본 후 고풍스러운 세인트판크라스역(St Pancras International Station)을 지나면 바로 닿을 수 있는 킹스크로스역으로 향했다. 런던의 길거리를 걸으며 한국과는 다르다고 느꼈던 점이 몇 있었다. 수염을 기른 남성이 많고, ‘길빵’과 무단횡단이 잦고, 셀룰러 통신이 실내외를 막론하고 잘 안 터진다는 점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팬이지만, 이번 여행에는 일정이 부족해서 워너 브라너스 스튜디오 런던의 더 메이킹 오브 해리포터(The Making of Harry Potter) 투어에 참가하지 못 했다. 대신, 킹스크로스역에 있는 플랫폼 9 3/4에 잠시 들러보기로 했다.

별 달리 대단한 게 있지는 않다. 작중에서 짐수레를 끌고 벽 속으로 사라지던 바로 그 지점에 반쯤 벽에 박힌 짐수레가 있고, 기숙사 목도리를 빌려준다. 그리고 직원이 사진을 찍어주면 돈을 주고 사는 식이다. 가격은 꽤 비쌌다. (1장 £9.50, 2장 £15.00, 3장 £20.00) 사진을 직접 찍으면 돈을 안 내도 된다는데, 왠지 다들 돈을 내고 찍고 있었다. 나는 기념 사진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눈으로만 훑어보고 지나쳤다.

바로 옆에는 열댓평 정도 되어 보이는 기념품 가게가 있었다.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물건의 구색이 꽤 잘 갖춰져 있어서 둘러볼만 했다. 가격은 역시나 꽤 비쌌는데, 구경하다보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도비 틴싸인(£7.00) 하나와 도비 티셔츠 한 벌(£19.99)을 구입했다.

Nenno Pizza @18:55 (BST)

킹스크로스역 근처에 있는 Nenno Pizza에 저녁을 먹으러 왔다. 편안하고 캐주얼한 느낌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주문은 카프리치오사 피자, 카르보나라 스파게티, 하우스와인 중 레드로 했다. 먼저 나온 와인은 약간의 산미와 페퍼민트, 블랙커런트향이 풍겼다. 너무 가볍지도 끈적이지도 않아서, 이후 나온 요리왁 함께 먹기 좋았다.

카르보나라는 기대했던 이탈리안식이었다. 달걀의 꾸덕한 맛과 염장육의 향이 잘 배어든 오일의 조화가 좋았다. 카프리치오사 피자 역시 맛있었다. 도우가 얇은데도 아주 쫄깃해서 식감을 즐기는 재미가 있었다. 토마토 소스는 감칠맛이 어마어마했다. 역시 어지간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는 실패할 수 없는 선택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38.50 = 카프리치오사 £11.25 + 스파게티 카르보나라 £10.25 + 하우스와인 250mL £6.75 x2 + 서비스 차지 10%)

피카딜리선(Piccadilly Line) @20:05 (BST)

아침에는 그렇게 붐볐었는데, 늦은 저녁 시간의 튜브 안은 꽤 한산하다. 튜브 안에서는 셀룰러 데이터 통신이 잘 안 되다보니, 미리 볼 거리나 읽을 거리를 준비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사파리 브라우저의 읽기목록에 넣어둔 문서들을 읽으니 시간이 잘 갔다.

종이 트래블카드는 끝까지 말썽이다. 그나마 아내 것은 개찰구에서 이상 없이 동작하는데, 유독 내 것만 구입 이래 단 한 번도 정상동작하지 않았다. 매번 개찰구에서 직원에게 트래블카드를 보여주며 이거 동작 안 된다는 얘기를 해야 했다. 이런 일이 잦은지 다들 별 말 없이, 또는 스마트폰에 가까이 하면 안 된다는 주의와 함께 수동으로 개찰구를 열어주었다.

비용 결산

  • Barbour Bedale Lightweight Waxjacket £228.00
  • 대영박물관 오디오 가이드 £7.00
  • 대영박물관 크림티 세트 £5.50 x2
  • 킹스크로스역 플랫폼 9 3/4 기념품 가게 £26.99
  • Nenno Pizza £38.50
  • 합계 £56.50 (+ 옷 £228.00, 선물 £26.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