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여행 2일차 (6 Jun 2019, Thu): 스탠리파크-다운타운 도보 여행

친구집 @7:44

평소 한국에서 일어나던대로 새벽 6시쯤 잠에서 깼다. 눈 떠 보니 평소와는 다른 시야가 낯설다. 시차 적응 때문인지 피로가 느껴져 조금 더 자다 8시가 다 되어서야 느지막히 일어났다. 10시까지 출근하면 되는 친구는 아직 자는 중인 모양이다.

이번 여행에 처음 개시한 송월 뱀부얀 수건은 밤새 의자 등받이에 걸어두었더니 냄새 없이 보송하게 잘 말랐다. 어지간한 폴리에스테르 재질의 여행용 타월보다 나은 것 같다.

오늘은 바깥 날씨가 아주 화창해보인다. 이번 밴쿠버 여행에서 하루는 다운타운, 하루는 노스밴쿠버의 숲에서 지내려고 했는데 다운타운 나가기 딱 좋은 날 같다.

론즈데일퀘이역(Lonsdale Quay Station) @8:55

뒤늦게 일어난 친구와 대충 미고랭 볶아먹고 같이 나왔다. 나는 여행, 친구는 출근이다.

역시 이번 여행에서 처음 개시한 Matador의 Freefly 16 접이식 백팩을 펴서 가지고 나왔다. 디테일은 별 게 없지만 아주 얇고 질기면서 가벼운 가방이다. 안에는 지갑, 여권, 보조배터리를 정리해넣은 파우치와 수돗물을 채워넣은 물통을 챙겼다.

바깥 공기에서 느껴지는 온도가 아주 기분 좋다. 햇빛 아래 있으면 따뜻하고, 그늘에 있으면 서늘한 정도다. 밴쿠버로 오기 전 한국은 미세먼지 날리는 늦봄이었는데 밴쿠버는 그보다 조금 더 서늘하면서도 공기가 꿀처럼 달콤했다.

론즈데일퀘이역에 있는 자판기에서 컴퍼스카드에 데이패스를 충전했다. ($10.25) 데이패스 본전 뽑으려면 대중교통을 환승 할인 없이 세 번 이상 이용해야 하는데, 내가 이날 이용한 교통수단은 아침 시버스 1번, 저녁에 지하철+시버스 1번이라 굳이 데이패스 살 필요가 없었다.

캐나다플레이스 (Canada Place) @9:28

론즈데일퀘이에서 시버스로 워터프런트역으로 건너왔다. 여기서 친구와 헤어져, 친구는 버스 타고 예일타운에 있는 직장으로, 나는 스탠리파크 쪽을 향했다. 친구는 스탠리파크를 전기 자전거를 대여해서 돌아보는 걸 추천했지만 나는 내 발로 쭉 걸어서 돌아볼 요량이다.

오전인데도 햇빛이 꽤 따갑다. 자외선이 상당히 강한 모양이다. 나오기 전에 온몸에 선크림을 바르고 나왔으니 피부는 괜찮겠지만, 눈이 걱정되어 안경에서 선글라스로 갈아썼다. 특히 이날은 계속 반사광 강한 물가를 걸었기에 내내 선글라스를 벗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편광 선글라스가 제 역할을 해줘서, 눈이 크게 피로하지 않았다.

워터프런트역에서 해안을 향해 잠깐 걸으면 바로 캐나다플레이스가 나타난다. 주변에는 수상비행기가 아주 많다. 저 멀리 수상주유소도 보인다. 크루즈선이 정박해있고, 하늘에는 헬기가 날아다닌다. 모두가 밴쿠버 관광 상품인데, 나는 내 발로 돌아보는 게 더 좋아 지나치기로 했다.

거리에는 전기 버스도 돌아다닌다. 분명 궤도가 없는 버스인데 트램처럼 거리 위에 설치된 급전선과 연결되어 있어 신기했다. 덕분에 트램보다 훨씬 길고 회전하는 형태의 암(arm)이 버스와 급전선을 연결하고 있었다.

Robson St @10:09

바닷가에 잘 조성된 공원을 따라 계속 걷다 역시 카페인성 두통이 가볍게 느껴져 롭슨 스트리트에 있는 커피 전문점에 커피를 마시러 왔다. 아침에 바닷바람 맞다 마시는 아메리카노는 정말 꿀맛이었다. ($3.55)

바로 근처에 있는 홀푸드마켓(Whole Foods Market)에서 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샀다. ($6.3) 시간상 점심은 스탠리파크를 걷다 중간에 앉아서 먹게 될 것 같다. 즉석 식품이나 샌드위치, 샐러드 같은 것들이 다양하게 갖춰져 있었는데, 밖에서 조리 없이 바로 먹을려고 하니 역시 샌드위치 밖에 없었다.

롭슨 스트리트는 밴쿠버에서도 손꼽히는 쇼핑 거리인데, 시간이 아직 일러서인지 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신 수많은 이민자들 상대하는 가게들을 볼 수 있었다. 대놓고 한글로 적힌 간판도 많았고, 일본이나 중동계 가게도 많아보였다.

스탠리 파크(Stanley Park) @10:55

롭슨 스트리트를 잠시 둘러보다 다시 마리나스퀘어(Marina Square), 데보니안하버공원(Devonian Harbour Park)를 거쳐 스탠리파크(Stanley Park)로 들어왔다. 오는 길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요트들을 볼 수 있었다. 밴쿠버 살면서 요트 한 척 가지고 있으면 휴일의 여유를 만끽하기에는 그만한 게 없을 것 같다.

밴쿠버 시월(Vancouver Seawall)을 따라, 왼쪽의 숲과 오른쪽의 바다를 감상하며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스마트폰은 방해금지모드. 한국에서 그렇게 시달리다 도피성으로 온 밴쿠버인데, 이렇게 여유를 즐기다보니 마음이 편히 이완되는 게 느껴졌다. 평일 낮인데도 주변에 산책이나 운동을 즐기는 사람이 많아서, 주변에 여유라는 것으로 꽉 차 있는 느낌이었다.

잔디밭과 산책로에는 구스들이 성체, 새끼 할 것 없이 떼를 지어 다녔다. 산책로 곳곳에 배설물이 널려있을 정도였다. 사람들이 특별히 해코지하지 않기 때문인지 별로 사람을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그 와중에 아장아장 뛰어다니며 넘어지기도 하는 구스 새끼들이 귀여워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보기도 했다.

토템폴(Totem Pole) @11:16

구스들을 뒤로 하고 계속 걷다보니 왼쪽으로 토템폴이 나타났다. 사람이 꽤 북적이는 곳이기도 했다. 사전 정보 없이 방문한 곳이었는데, 안내가 꽤 자세히 나와있어 읽어볼만 했다.

다른 고대 문명들과 마찬가지로 아메리카 서북부인 여기에도 대홍수의 신화가 존재하고, 특히 카누를 들고 있는 조상의 형상으로 표현되는 점이 아주 흥미로웠다. 천둥새, 범고래, 늑대, 그리즐리베어 같은 북미 냄새 물씬 나는 애니미즘의 흔적 역시 그랬다.

하지만 이렇게 도심 속 공원의 일부로서 남아있는 토템폴들은 결국 백인 이주민에 의한 원주민 탄압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실제로 라이온스게이트브리지(Lions Gate Bridge) 조성 과정에서, 스탠리파크 지역에 살던 원주미들이 강제이주당했다는 이야기도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원주민과 그들의 고유 문화는 사라지고, coat-of-arms로서의 토템폴만 덩그러니 남았다. 씁쓸한 대목이다.

브록포인트등대(Brock Point Lighthouse) @11:55

스탠리파크의 동쪽 끝에 해당하는 브록포인트등대에 도착했다. 여기쯤부터 자전거 도로와 인도가 분리되어, 바다에 가까운 길은 인도로만 접근할 수 있었다. 운이 좋으면 여기 근처에서 바다사자(Sea lion)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눈을 크게 뜨고 둘러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브록포인트등대에 있는 벤치에 앉아, 홀푸드마켓에서 사온 샌드위치를 꺼냈다. 혼자 공원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 먹자니 조금은 청승맞기도 했지만, 어쨌든 일렁이는 바다와 저 너머 밴쿠버항, 라이언스게이트브리지를 바라보며 점심 먹는 운치가 괜찮았다.

브록포인트등대를 지나자 이내 모래톱과 자갈밭이 번갈아 나타난다. 제법 생물군이 다양해보인다. 중간중간 경관이나 주변 생태에 대해 설명해주는 패널이 설치되어 있어 도움이 많이 됐다.

라이언스게이트브리지(Lions Gate Bridge) @12:30

계속 걷다보니 스탠리파크 북쪽 끝에 해당하는 라이언스게이트브리지가 나타났다. 라이언스게이트는 꽤나 멋지게 생긴 현수교였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못지 않았다. 그 너머로 다리 동쪽에서는 웨스트밴쿠버를, 서쪽에서는 노스밴쿠버가 배경처럼 보여 풍경이 더욱 운치있었다.

좀 더 걸어가자 이제 끝없는 바다가 눈 앞에 나타난다. 실제로는 밴쿠버섬이 태평양과 스탠리파크 사이를 막고 있어 잘 보면 산등성이가 구름 아래 낮게 나타난다. 그렇더라도 탁 트인 바다와 하늘이 너무나도 푸르고 높고도 아득하기만 했다. 계속 보고 있자니 왠지 슬프고 우울해져왔다. 이렇게 거대한 자연의 여유 앞에 서고 보니 왜 그리 아둥바둥 괴롭게 살고 있었나, 싶었다. 여행 중 드물게 감상에 잠겼던 순간이었다.

잉글리시베이비치(English Bay Beach) @13:20

라이언스게이트브리지에서 잉글리시베이비치 사이에도 여러 볼 거리들이 많다. 제우스비치(Zeus Beach), 시워시락(Siwash Rock), 할로우트리(Hollow Tree), 서드비치(Third Beach) 등이 그것이다. 이들을 지나, 잉글리시베이비치까지 오면 스탠리파크가 끝나고 다시 도심이 시작된다.

천천히 쉬어가며 점심도 먹어가며 걸어보니 스탠리파크 외곽을 따라 도는데 세 시간 반 정도 걸렸다. 만만치 않은 거리라 보통은 자전거나 마차 투어가 추천되곤 한다. 그래도 시간 여유가 있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다행히 바닷가 따라 걷는 길이다보니 대부분 평지라 그렇게 힘든 구간이 있지도 않다.

잉글리시베이비치에서는 친구가 강추한 핫도그를 먹어보기로 했다. Alberta all beef hot dog($3.75)는 핫도그빵 안에 훈연향이 아주 훌륭하고 엄청나게 짠 소시지를 끼워주는 메뉴였다. 대신 다양한 토핑과 소스를 셀프로 추가해서 먹을 수 있었다. 소시지가 워낙 짜다보니 야채를 충분히 끼얹는 쪽이 그나마 조화가 좋았다. 소스도 여러가지를 부분부분 넣어봤는데, 역시 한국 사람이라 그런지 Magic garlic이 제일 좋았다.

밴쿠버에 있는 공원들은 대체로 관리가 잘 되어 있는데다 화장실이 무료인 게 좋다. 특히 바닷가에 있는 공원들은 하나 같이 휠체어를 타고도 해변에 나갈 수 있게 매트를 깔아둔 점이 눈에 띄었다.

잉글리시베이비치를 벗어나려는데, 한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왔다. 대뜸 한국에서 왔냐고 물어보는데, 어떻게 알았냐고 되물으니 그냥 보면 안단다. 이후 내용은 흔한 기독교 전도였다. 중간중간 한국어 단어를 섞어가며 말씀하시는 게 신기해서 좀 들어보다 헤어졌다.

선셋비치(Sunset Beach) @14:08

전날 비 맞으며 걸었던 킷실라노가 바다 건너로 보인다. 바다와 평지, 높은 산이 어우러진 멋진 풍경이다. 전날 날씨가 맑았다면 킷실라노에서 역시 바다, 평지, 높은 산에 다운타운의 고층 빌딩이 어우러진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 같다.

공원에는 ‘Goodbye Graffiti’라고 적힌, 그래피티를 지우는 일을 하는 걸로 보이는 픽업 트럭과 풍채 좋은 아저씨도 돌아다니고 있었다. 워낙 그래피티가 많은 동네다보니 이런 전문 직종도 생기는 모양이다.

여행 중간중간 밴쿠버의 풍경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남기고 있는데, 여기서는 사진을 별로 못 찍었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해변에 사람이 적잖게 있었는데, 비키니 입고 다니는 분들이 많다보니 함부로 카메라를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차이나타운(China Town) @15:04

선셋비치를 지나, 전날 갔었던 그랜빌아일랜드를 바다 건너로 바라보며 그랜빌스트리트다리를 지나, 수변을 따라 조성된 공원을 계속 걷다보니 사이언스월드(TELUS World of Science)까지 왔다. 밴쿠버 다운타운을 둘러싼 해안가는 전부 돌아본 셈이다.

이제 방향을 꺾어, BC플레이스(BC Place), 앤디리빙스턴파크(Any Livingstone Park)를 지나 차이나타운에 접어들었다. 들어서자마자 차이나타운이라는 티가 대놓고 난다. 거리 표지판부터가 색상이 달라진데다 한자가 병기되어 모를래야 모를수가 없다. 영어 거리명을 음차한 한자를 읽어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였다.

확실히 거리와 가게에서도 중국 느낌이 많이 났다. 길가의 가로등마다 걸린 현수막에는 팬더 캐릭터와 함께 ‘唐人街’라고 적혀있었고, 중의원, 중국 식재료 판매상 등이 즐비했다. 거리를 걸으며 들리는 말도 중국어가 대부분이었다.

그 와중에 묘하게 한국어 간판도 많이 보였다. 중의원에도 한자, 영어와 함께 ‘병원’이라는 한글 표기가 있었고, 온통 한자 간판 가득한 차이나타운 한가운데에 ‘장모집’이라는 한식집이 박혀있는 점이 재미있었다.

쑨원 박사 중국 전통식 정원(Dr. Sun Yat-Sen Classical Chinese Garden) @15:34

여러 번의 대만 여행 이후 쑨원과 중국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그러던 차에, 밴쿠버에서 ‘Sun Yat-Sen’이라는 이름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한국에서는 주로 ‘손문’ 또는 ‘쑨원’, 중국에서는 ‘孫中山’으로 불리지만 영미권에서는 호인 일선(逸仙)을 따서 ‘Sun Yat-Sen’으로 많이 쓴다.)

알고보니 정말로 쑨원이 살았다거나 한 곳은 아니고, 민간 협력 차원에서 중국 쑤저우에 있는 명대의 정원을 밴쿠버에 재현한 곳이었다. 쑨원의 망명생활 시절 밴쿠버에 몇 번 들른 적이 있다니 아주 쌩뚱맞은 건 아니지만 직접적인 관련보다는 존경의 의미로 이름 붙였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어쨌든 정원은 무료인 부분과 유료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무료로 들어갈 수 있는 곳까지만 가볍게 둘러봤다.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져 둘러볼만 했다. 특히 뜨거운 태양 아래 몇 시간씩 걷다 나무그늘에 들어오니 그것만으로도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CRAB파크앳포트사이드(CRAB Park at Portside) @15:47

중국 전통식 정원에서 나와 차이나타운을 둘러보며 메인스트리트(Main St.)를 따라 다시 밴쿠버 다운타운 북쪽 해안가까지 걸어왔다. 중간에 인적 드물고 으슥한 느낌이 들어 지도를 확인하니 길을 잘못 든 걸 뒤늦게 깨달았다. 이스트사이드(Downtown Eastside) 한복판이었는데, 친구가 위험하니 절대 가지 말라고 귀띔해줬던 곳이었다. 다행히 별 일 없이 다운타운으로 돌아나올 수 있었다.

메인스트리트의 북쪽 끝은 원을 그리며 철길 위를 통과하는 육교다. 육교를 건너면 CRAB파크로 이어진다. 꽤 너른 규모의 공원이었는데, 잘 자란 잔디와 드문드문 심어진 나무로 잘 꾸며져 있었다.

공원 너머로는 다운타운의 고층빌딩이, 반대쪽으로는 밴쿠버항이, 바다 너머로는 노스밴쿠버와 높다란 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보였다. 특히 밴쿠버 다운타운 도보여행의 출발점이었던 캐나다플레이스가 바로 앞이었다. 정말로 걸어서 밴쿠버 한 바퀴를 다 돌았다는 성취감을 주는 풍경이었다.

공원 초입에는 ‘Urban Indian’이라는 시가 새겨진 시비가 있었다. 자유롭고 기개를 떨쳤던 원주민들이 도시화된 환경 속에서 빈민으로 전락하고 마는 현실에 대해 개탄하는 글이었는데, 읽어볼만 했다. 이날 아침에 보고 온 토템폴이 겹쳐보이기도 했다. 둘 다 삶의 터전을 빼앗긴 원주민들의 처지를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개스타운(Gastown) @16:04

CRAB파크에서 돌아나와 다시 서쪽을 향했다. 갑자기 거리 분위기가 힙해져서 보니 어느새 개스타운에 들어와있었다. 확실히 깔끔하고 다양한 개성이 보이는 가게들이 한창 성업 중이었고, 유달리 거리에 사람도 많았다.

이날 하루 종일 물과 샌드위치만 먹고 하루 종일 걸었던 덕에, 시원한 맥주 한 잔이 절실했다. 그런데 워낙 사람이 많고 북적여 혼자 앉아 술 마실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사실 들어가서 바에 앉아도 됐을텐데, 그러기에는 소심한 성격 탓에 용기가 안 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고민하며 걷다보니 붐비는 거리에서도 유달리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이 있었다. 유명한 증기시계(Steam Clock)이었다. 나는 막상 증기시계를 봐도 이게 왜 그렇게 유명한 건지 감흥이 잘 오지 않았다. 그보다 저렇게 많이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는 게 더 신기하게 다가왔다.

친구가 개스타운은 낮보다 밤에 오면 정말 예쁜 동네라고 했는데, 정말 그럴 것 같다. 낮에 와도 이렇게 힙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해가 지고 가로등과 조명이 켜진 거리에서 야외 테이블에 앉아 가벼운 음식에 술을 즐기면 아주 운치가 좋을 것 같았다.

어쨌든 밴쿠버 다운타운 외곽을 따라 한 바퀴를 다 돌았으니, 이번에는 다운타운 내부를 걸어볼 차례다. 아침에 출발했던 워터프론트역 앞에서 다시 시작해서 여러 거리를 오가며 남서쪽으로 걸었다. 다운타운은 오래된 것 같으면서도 잘 정돈된 분위기였다. 일본의 도시들이 대체로 그런데, 일본과는 또 다른 북미 도시 특유의 느낌이 있었다.

도중에 많은 건물들을 봤는데, 특히 인상 깊었던 건 밴쿠버공공도서관(Vancouver Public Library)이었다. 밖에서 보이는 건물 외관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미적 균형을 생각하며 건설된 티가 역력했다. 내부도 현대적으로 아주 잘 꾸며져 있었다. 한국어 책도 꽤 있었다. 시간 여유가 있었다면 여기에서 지친 다리를 쉬며 책 읽다 갔을텐데, 짧은 일정이 아쉬웠다.

The New Oxford @16:54

예일타운(Yale Town)에서 일하는 친구가 퇴근하면 같이 만나 저녁 먹기로 했는데, 막상 예일타운까지 오고 보니 시간이 어중간했다. 하루 종일 걸었더니 잠시 쉬고 싶기도 하고, 맹물 대신 알코올이 시급하기도 하고, 북미 서부 지역의 맛있는 크래프트 비어를 찾던 차에 마침 적당해 보이는 펍이 있어 들어갔다.

펍 안은 한산한 편이었다. 바텐더가 바삐 움직이는 바 근처에만 몇 명이 앉아 바 위에 걸린 TV를 보고 있었다. 나도 바텐더와 가볍게 인사하고서 바 한 켠에 자리를 잡았다. 지난달 런던 여행 때 익힌 잉글리시펍 이용법이 확실히 도움이 됐다.

첫잔으로 ‘Backcountry Tailbreaker Pale Ale’을 주문했다. 지쳐있다보니 가벼운 영국식 페일에일로 시작하고 싶었다.

능숙하게 따라진 페일에일을 건네 받아 한 모금 들이켰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너무 차갑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딱 적당한 온도에 플로랄한 홉향이 안면 가득 펴져왔다. 거의 완전히 불투명한 빛깔이었는데 그만큼 아주 부드럽고 자잘한 입자감이 넘치는 맛이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비어 리스트를 받아봤는데, 거의 절반이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출신의 지역 맥주들이었다. 세상에, 내가 이 동네 살면 매일 같이 술을 퍼마실텐데.

그 중 뭘 마셔야 할지 고르기가 어려워 바텐더에게 추천을 요청했다. ‘이 동네 맥주 중에 추천해줄만한 게 있냐’고 물었더니 ’많이 Hoppy해도 괜찮냐’길래 ‘Yes, I do. Absolutely.’라고 답했더니 한달음에 탭에서 맥주 한 잔을 뽑아다줬다.

투명한 빛깔에 받자마자 강렬한 홉향을 느낄 수 있었던 그 맥주는 ‘Driftwood Fat Tug IPA’였다. 아주 플로랄하게 피어나는 홉향과 깔끔하게 끊어지는 맛은 전형적인 웨스트코스트 IPA였다. 샌디에이고 대신 밴쿠버에서 즐기는 IPA 역시 아주 휼륭했다.

바에 나란히 앉은 아저씨들의 시선이 가 있던 TV를 올려다보니, 아이스하키 경기가 생중계되고 있었다. 알고보니 무려 스탠리컵 결승 5차전 경기였다. 캐나다 팀들은 다 탈락하고 미국 팀들(세인트루이스, 보스턴)끼리의 결승이다보니 다들 편하게 구경하는 분위기였다.

경기 템포가 어마어마하게 빨라 감탄하고 있으니 주변 아저씨들이 하키부심을 부려주셨다. 비록 캐나다팀은 결승에 못 올라왔지만 양팀, 특히 세인트루이스는 로스터 대부분이 캐내디언이라고. 딱히 아는 게 없으니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경기를 재미나게 보다 나왔다. ($12.65 + Tip $2.35)

친구네 회사 @18:00

친구 퇴근 시간이 되어, 바로 근처에 있는 친구네 사무실로 갔다. 게스트 카드 발급 받아 내부 구경도 했는데, 이쪽 업계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인데 내부는 스타트업 마냥 자유롭고 깔끔했다.

나는 하드웨어 개발자이다보니 아무리 큰 회사로 가도 제조업 특유의 오래되고 보수적인 느낌에서 벗어나기 어려운데, 역시 소프트웨어 업계는 이런 부분이 확실히 말랑말랑한 모양이다. 부럽다. 나도 이런 환경이면 더 창의적인 회로 설계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Sushi Town @19:20

사무실에서 나와, 퇴근시간이라 북적이라 지하철을 타고서 워터프론트역으로, 시버스로 갈아타고 노스밴쿠버로 왔다. 론즈데일퀘이역에서 친구 아내와 만나, 꽤 큰 규모의 스시집인 스시타운으로 왔다.

밴쿠버에서 유명한 스시집들은 대부분 한인 가게란다. 여기도 예외가 아니었다. 분명 안내나 메뉴는 영어로 적혀있는데, 들어가서 자리 잡고 주문하고 나올 때까지 영어를 한 마디도 안 써도 됐다. 들어가자마자 한국계 점원이 한국어로 응대하는 것에 내가 되려 당황해버릴 정도였다.

진짜 일본식 스시야는 아니었고, 스시와 롤을 캐주얼하게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연어 샐러드와 롤을 주문했는데, 심지어 샐러드에는 한국에서도 익숙한 붉은 소스가 뿌려져 있었다. 맛은 특별히 기교를 부렸다기보다 있는 재료 그대로의 맛이었다. 아내가 미들급 이상의 스시야에 자주 데리고 간 덕에 입맛을 버려놓아 큰 감동을 받지는 못 했다.

다만 딱 한 가지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건 연어였다. 나에게 연어회나 연어초밥은 저가 횟집이나 일식집에서 싼값에 양을 불릴 때 쓰는 것, 딱 그 정도의 이미지였다. 밴쿠버에서 먹은 연어는 좀 달랐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먹는 연어 특유의, 전체적으로는 물컹하고 부분적으로는 거친 조직에서 오는 불쾌한 식감이 없었다. 대신 쫀득하게 씹는 느낌이 살아있고 비린내가 거의 없어 먹는 즐거움이 있었다.

웨스트밴쿠버 @20:17

식사를 배불리 마치고 친구네 부부와 같이 웨스트밴쿠버로 넘어왔다. 어느새 쌀쌀해진 공원에 앉아 해넘이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담소를 나눴다. 친구와 내 취향이 다른 부분도 많았는데, 그럼에도 염치 불구하고 며칠씩 집에 얹혀있다 가는 아저씨를 잘 챙겨주어 고마웠다.

친구집 @22:40

친구네 집으로 돌아와서, 씻는둥 마는둥 하고 거실에서 잠시 얘기를 나누다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기절하듯 쓰러져버렸다. 저녁 약을 챙겨먹었어야 했는데, 약은 커녕 불도 안 끈 채로 그대로 정신을 놔버렸다. 워낙 많이 또 오래 걸었던 날이라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아이폰 건강앱을 보니 이날 42,659걸음으로 27.5km를 걸은 걸로 기록되어 있었다. 스탠리파크 포함해서 밴쿠버 다운타운 외곽을 한 바퀴 빙 둘러 돌고, 다운타운 내부도 훑고 다녔으니 많이 걷긴 했다.

그래도 스탠리파크나 밴쿠버 다운타운은 걸어서 돌아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일단 걸어서 돌아보지 못 할 정도로 그렇게까지 큰 도심이 아니다. 스탠리파크와 밴쿠버 다운타운이 각각 서울 여의도 정도 크기 밖에는 안 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보다 걸으며 구경하니 조그만 표지판 하나, 구스 한 마리까지 여유 있게 바라볼 수 있는 점이 좋았다.


2019 캐나다 밴쿠버 여행


밴쿠버 여행 1일차 (5 Jun 2019, Wed): 인천-밴쿠버, 입국심사, 키칠라노 비치, 그랜빌 아일랜드

인천국제공항 가는 길 @13:20 (KST)

유연근무제의 이점을 적극 활용해서 오전 근무만 마치고 퇴근했다. 일이 적지 않아서 점심도 거르고 빡빡하게 일해야 했지만 다행히 늦지 않게 짐 챙겨 나올 수 있었다. 회사 근처에서 리무진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리무진 버스가 고속도로 들어서자마자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돌발성 문제가 생겼단다. 내가 회사에 있을 때는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퇴근하자마자 문제가 생기냐… 당장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라 일단 통화를 끝냈지만 찝찝함이 오래 남았다.

그래도 모처럼 혼자 가는 여행인데 이런 찝찝함을 안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스로에게 화가 났는지, 화가 났다면 왜 났는지, 어떻게 하면 기분이 나아질지에 대해 가능한 마음을 편히 가지고 들여다봤다. 다행히 이내 격해졌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회사의 상담심리사와 꾸준히 상담한 게 도움이 됐다.

인천국제공항 2터미널 마티나 라운지 @15:38 (KST)

공항 도착한 게 14:50이었으니 라운지에 착석하기까지 50분 가까이 걸렸다. 보통 공항에 사람이 어지간히 많지 않으면 늦어도 30분 내에 모든 수속을 마칠 수 있다. 이번에는 순전히 수화물 위탁과 면세점 때문에 시간이 좀 더 걸렸다.

평소 같으면 절대 수화물을 위탁하지 않는데, 이번 여행에서 신세질 친구 선물 중 액체류가 많아 어쩔 수가 없었다. 미주행 항공편이라 셀프 체크인이 안 되어 유인 체크인 창구를 이용해야 했고, 포장 상자가 트레이에 싣기 너무 작아 직원이 트레이에 일일이 테이프로 고정하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면세점 역시 평소에는 이용할 일이 없는 곳이다. 내가 면세점에서 살만한 거라고는 위스키 정도인데, 들고 다니기 귀찮으니 보통은 귀국편 기내 면세점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역시 이번 여행에서 신세질 친구가 부탁한 게 있어 들렀는데, 평소에 이용 않던 곳이라 좀 헤매고 말았다.

2터미널 마티나 라운지는 처음이다. 아직 오래 되지 않아 깔끔했다. 먹거리는 제대로 된 식사보다는 대체로 분식 위주였다. 대신 마실 거리가 다양한 것과 100Mbps를 가볍게 찍어주는 와이파이가 좋았다.

일하느라 점심을 굶고 왔기에 라운지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작은 컵라면 하나에, 과일과 채소 위주로 챙겨먹었다. 지난달 영국 여행 때 비행기 탑승 전 양껏 먹었다 소화가 잘 안 되어 고생했던 기억 탓이다. 결과적으로 잘 한 선택이었다.

KE71 항공기 안 @18:51 (KST)

비행기에 탑승해서 자리를 잡았다. 이번 여행편은 인천-밴쿠버간 대한항공 직항 왕복편으로 예약했다. 장거리 비행을 유독 힘들어하는 터라 환승편을 알아보고 싶었는데, 이번 여행 일정이 짧은데다 중간에 기항할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 직항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인천에서 밴쿠버까지는 10시간 이상 걸리는 꽤 먼 거리다. 탑승 직전에 장거리 비행에 대한 대비를 단단히 했다. 워터 파운틴에서 접이식 물통에 물을 채우고, 목에는 목 베개를 걸고, 챙겨온 모직 후드 집업을 입고,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썼다.

탑승해보니 베개, 담요, 생수, 슬리퍼, 치약, 칫솔, 헤드폰까지 모두 기본 제공됐다. 특히 헤드폰은 2핀 짜리 기내용 전용 플러그가 아니라 일반 3.5파이 플러그를 사용하는 점이 신기했다. 결과적으로 담요와 슬리퍼를 제외하고는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KE71 항공기 안 @19:47 (KST)

이륙 후 고도가 안정되자, 기내식이 나왔다. 이번 밴쿠버 여행을 위해 미리 대한항공 홈페이지에서 특별 기내식 중 하나인 과일식을 신청했다. 역시 장거리 노선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가기 위한 궁리 중 하나였다.

막상 과일식 받아보니 꽤 만족스러웠다. 밀타임 중 가장 먼저 식사를 받아보는 것도 좋았고, 상대적으로 소화가 잘 되어 속이 편했다. 양이 약간 모자라는 것도 같았지만 결과적으로는 과하게 먹지 않은 쪽이 좋은 몸 상태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됐다.

과일식의 구성은 무난했다. 수박, 파인애플, 사과, 메론, 오렌지, 바나나 등 다양한 과일이 조금씩 제공됐다. 통조림이 아닌 생과일이고, 말라있지도 않아서 만족스럽게 잘 먹었다.

KE71 항공기 안 @20:27 (KST)

진작 밥을 다 먹고 한숨 돌리고 있자니 다른 승객들의 식사가 나왔다. 슬쩍 보니 메뉴는 비빔밥인듯. 남들보다 식사를 한 시간이나 일찍 한 셈이다. 기내식 먹을 때는 항상 시간에 쫓기는 느낌이었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아 마음이 편했다.

기내 온도는 어느새 20도까지 떨어졌다. 조금씩 한기가 돌았다. 비행기 탈 때 미리 긴팔 후드 집업을 입었더니 상체는 괜찮았는데, 긴 바지 입은 하체가 추웠다. 담요로 하반신을 둘둘 감싸니 좀 버틸만 했다.

저녁을 소화시키는 동안 넷플릭스에서 받아간 드라마 <셜록> 시즌 2를 봤다. 얼마 전 영국 갔다 너무 추워서 바버 재킷을 샀었는데, 드라마 속 왓슨도 바버 재킷을 입고 있었다. 딱 영국이나 밴쿠버 같은 서안 해양성 기후를 보이는 곳에 딱인 옷 같다. 한국은 봄, 가을이 건조한데다 미세먼지가 잦아 왁스 재킷 입기에는 별로다.

KE71 항공기 안 @2:40 (KST+1)

뒤척거리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많이 잤다. 6시간 정도 잤는데, 이 정도면 지금까지 내 여행 이력 중 손꼽히게 길게 잔 편에 속한다. 안대,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 목베개가 큰 도움이 됐다.

인천에서 밴쿠버로 갈 때는 늦은 오후에 출발해서 같은 날 점심 때 도착하는 일정이라 첫날 일정을 제대로 소화하려면 가는 동안 최대한 자둬야 한다. 반대로 인천으로 돌아올 때는 인천 도착이 늦은 오후라 시차 적응하려면 너무 많이 자면 안 된다. 기내에서 노는 건 그때 놀면 되겠다.

KE71 항공기 안 @2:54 (KST+1)

두 번째 과일식이다. 아침으로 나온 거라 그런지 양이 줄었다. 그래도 여전히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어 좋다. 과일식 먹으니 배가 확실히 빨리 꺼지기는 하지만, 출출한 정도라 별 불편함은 없다.

KE71 항공기 안 @4:21 (KST+1)

슬슬 바깥에 육지가 보인다. 곧 착륙할거라는 안내도 나왔다. 길었던 비행이 끝나간다. 이런저런 준비를 잘 했더니 역시 지난달 런던 때보다 비행을 조금은 편하게 버텨낸 것 같다.

창 밖을 보니 빽빽한 침엽수림이 내려다보인다. 6월인데 여기저기 눈도 쌓여있다. 신기했다. 전혀 다른 대륙으로 여행왔다는 게 실감나기 시작했다.

밴쿠버 국제공항 (Vancouver International Airport) @13:14

도착했다. 밴쿠버 국제공항은 생각보다 규모가 작아보였다. 대신 캐나다의 자연 환경을 상징하는 여러 장식물로 잘 꾸며져 있었다. 특히 물이 흐르게 해둔 곳이 많아서, 물소리를 들으며 움직이는 게 기분 좋았다. 입국장으로 가는 통로가 출국장 머리 위에 고가도로처럼 매달려있는 점, 캐나다의 공용어인 영어, 프랑스어 외에도 중국어가 안내판에 같이 병기되어 있는 점도 눈에 띄었다.

밴쿠버를 비롯한 캐나다 서부가 하이시즌으로 들어가는 시기라 그런지 입국심사대로 가는 줄이 내가 지금까지 여행 다니며 겪은 것 중 역대급으로 길었다. 분명 줄이 줄어드는 속도는 상당히 빠른데 아직 입국심사대는 보이지도 않는다.

밴쿠버 국제공항 입국심사대 @13:57

2016년 11월부터 캐나다도 미국 ESTA처럼 사전에 인터넷을 통해 eTA 승인을 받아야 한다. eTA는 일찌감치 승인 받아놔서 걱정이 없었다. 입국심사대 근처 키오스크에서 eTA 신청 내용에 대해 다시 확인한 후 영수증 같은 걸 받을 수 있는데, 이걸 입국심사대에 여권과 함께 제출하고 입국심사를 받게 된다.

이전에 미국이나 영국에도 별 문제 없이 잘 입국했었기에 입국심사에 대해 그리 큰 걱정은 없었지만, 조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있었다. 이번 밴쿠버 여행에서는 캐나다 영주권자인 친구의 호의로 친구네 집에 묵기로 했는데, 덕분에 입국심사 때 단골로 요구 받는 항목인 호텔 예약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실제 입국심사는 무사히 끝났다. 여권 외의 서류도 전혀 요구받지 않았다. 입국심사관과 주고 받은 질문과 답변은 이랬다.

Q: 캐나다에는 왜 왔니?
A: 여행.

Q: 캐나다에는 얼마나 있을거니?
A: 나흘.

Q: 캐나다는 처음 온 거니?
A: Yes.

Q: 캐나다에서 뭐할거니?
A: 친구 집 방문하고 밴쿠버 구경.
(‘친구’ 얘기 나오자 눈빛 변하는 걸 보고 ‘아차’ 싶었음)

Q: 친구랑 어떻게 아는 사이니?
A: 대학교 동기.

Q: 친구는 어떤 사람이니?
A: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작년에 아내와 같이 캐나다 영주권 취득, 이번에 XX(밴쿠버 내 지역명)에 집을 사서 나를 초대함.

Q: 너는 직업이 뭐니?
A: XX(다국적회사 이름)에서 일하는 전자회로 엔지니어.
(여기까지 대답하자 다시 눈빛 유해짐. 친구 말로는 엔지니어에 아주 호의적이라고 함.)

Q: (가방이 백팩 하나 뿐인 걸 보고) 짐은 그게 다니?
A: Yes. 나흘 있다 갈건데 이거면 충분하지.

입국심사 기다리는 줄에서 내 바로 앞이 내 또래의 한국 여자분이었는데, 입국심사에 대해 걱정이 많이 되셨는지 나에게 이것 저것 물어보기도 하셨다. 내가 입국심사 통과하고 나가는 길에 돌아보니 출국장으로 나오는 대신 짐과 서류를 바리바리 들고서 어디론가 불려가는 것 같았다. 역시 캐나다 입국심사가 만만치 않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밴쿠버 국제공항 팀 홀튼(Tim Hortons) @14:15

입국 심사를 무사히 마치고, 위탁 수화물로 보냈던 친구 선물 꾸러미도 찾아 다시 백팩에 넣고서 입국장을 빠져나왔다.

생각해보니 비행기에서도 커피를 전혀 마시지 않았다. 편히 자려고 일부러 카페인을 외면했던 건데, 덕분에 카페인성 두통이 극심하게 몰려왔다. 일단 카페인 섭취가 시급해서, 공항을 빠져나가는 대신 팀 홀튼에서 따끈한 커피 한 잔을 사서 자리를 잡았다. ($ 2.1)

여행 오면 가장 헷갈리는 것 중 하나가 화폐다. 환율이야 미국 달러 비슷하니 쉽게 적응할 수 있는데, 특히 동전 모양이 아주 구분하기 어려웠다. 커피 마시면서 거스름돈으로 받은 동전들을 이리저리 굴려보며 익숙해지려 애썼다.

밴쿠버국제공항역 (YVR-Airport Station) @15:05

분명 수요일 늦은 오후 비행기를 탔는데 공항 밖으로 나오니 또 수요일 늦은 오후다. 시차의 신비로움이란. 물론 귀국일에는 토요일 오전 비행기를 탔는데 내리니 일요일 저녁이라는 대비극이 벌어질 예정이다.

이제 친구가 퇴근하는 저녁 때까지 혼자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바깥 날씨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잔뜩 찌뿌린 하늘에서는 조금씩 빗방울이 날렸다. 일단 공항은 벗어나야 하니 친구에게 추천 받은 키칠라노 비치(Kitsilano Beach)에 나가보기로 했다.

스카이 트레인 표지판을 따라 고가 정류장으로 올라가서, 공항 구간을 포함한 데이패스를 구입했다. ($21.25 = Day Pass $10.25 + Canada Line YVR AddFare $5 + Compass Card Deposit $6) 추가 요금 $5는 내지 않을 수 있는 꼼수가 있는데, 별로 바람직하지 않아보여 정직하게 지불했다.

컴퍼스 카드 보증금은 나중에 돌려받을 수는 있는데, 방법이 좀 까다롭다. 보통은 공항에 있는 교통카드 보증금 반환 창구를 이용하면 되는데, 밴쿠버 공항에는 그런 게 없기 때문이다. 대신, 차이나타운에 있는 Compass Customer Service Centre나 워터프론트역에 있는 West Coast Express Office에 직접 방문하거나, 양식을 작성해서 우편으로 보내야 한다. 나는 그냥 친구에게 시간 있을 때 환불 받아 커피 사먹으라고 줘버리고 돌아왔다.

브로드웨이-시청역(Broadway-City Hall Station) @15:37

전철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러 가는 길이다. 주변의 느낌은 미묘하다. 영국 같기도 하고, 미국 같기도 하고. 지하철이나 영어 철자법은 영국 같고, 전반적인 문화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미국 서북부와 많이 닮아있는 것 같다.

구글맵을 참고해서 버스 정류장을 찾아간 후 버스에 올랐다. 여전히 날은 잔뜩 흐려있다.

키칠라노 비치(Kitsilano Beach) @15:50

버스에서 내려 Vine st를 따라 조금 걸으니 바로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바다를 따라 수영장과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이 수영장이 키칠라노 비치의 서쪽 끝에 해당했다. 여기서부터 동쪽을 향해 되는대로 걸어보기로 했다.

날씨가 흐린데 생각보다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날씨가 좋았으면 인파로 북적였을 것 같다. 햇빛이 없는데도 눈부시다는 느낌이 들어 선글라스를 쓰니 눈이 훨씬 편하다. 오기 전에 친구가 선글라스를 꼭 챙겨오라고 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해안가를 따라 많은 새들이 날아다녔다. 갈매기, 까마귀, 비둘기가 뒤섞여있었다. 이 새들을 한 자리에서 보는 것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중간중간 백사장도 꾸며져 있었다. 커다란 통나무를 벤치처럼 줄지어 놓은 게 독특했다. 나중에 보니 킷실라노 말고도 밴쿠버 주변 해수욕장은 모두 이런 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모래밭 중간에 길게 깔린 매트도 눈에 띄었는데, 휠체어 탄 사람도 해변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였다.

한참 해변을 따라 걷다 길가에 ‘Vancouver in the rain’이라는 제목의 글이 새겨진 시비 같은 것이 있어 좀 읽어보려던 찰나,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다. 이 무슨 기막힌 타이밍이람. 가방에서 윈드브레이커 재킷을 꺼내 입고 후드를 뒤집어 쓰니 비가 더욱 세차게 쏟아졌다.

비를 맞으며 킷실라노 시월(Kitsilano Seawall)과 여러 박물관이 조성된 공원을 걸었다. 밴쿠버 다운타운이 가까워짐에 따라 바다 건너로 잉글리시 베이 비치(English Bay Beach)나 선셋 비치(Sunset Beach)도 차례로 보였다.

비가 와서인지 사실 풍경은 잘 와닿지 않았다. 분명 경치 좋다고 한 곳인데, 맑은 날에 와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나보다. 가까이서 보니 바닷물도 냄새 나고 그리 깨끗하지 않았다.

대신 어느새 구스 말고는 나 밖에 없는 공원을 걷자니 추적추적 쏟아지는 빗소리에 발 아래 밟히는 자갈 소리, 여기저기서 들리는 새소리가 기분 좋았다. 이번 밴쿠버 여행은 사실 일종의 도피성인데, 분명 도심에 있음에도 망중한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랜빌 아일랜드(Granville Island) @16:45

키칠라노 비치에서 바닷가를 따라 계속 걸어가자 그랜빌아일랜드로 이어졌다. 한 시간 정도 걸었는데, 걸은 시간은 짧았지만 여행짐을 짊어지고 있었던 탓에 어깨가 피곤했다. 백팩을 어디라도 맡겨두고 싶었는데, 테러 위험 탓인지 공공장소에는 코인락커가 전혀 없어 계속 짊어지고 다닐 수 밖에 없었다.

중간중간 벤치에 앉아 쉬어가며 그랜빌아일랜드를 둘러봤다. 지도에서 보고 생각했던 것보다 작은 섬이다. 그냥 가볍게 둘러보려면 30분도 채 안 걸릴 것 같다. 대신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있어 잠깐씩 눈길을 끌었다.

그랜빌아일랜드 북쪽에 위치한 퍼블릭마켓은 아주 깨끗한 동네 시장 같았다. 올리브 오일, 메이플 시럽, 훈제연어, 소시지 등을 파는 가게와 식당들이 줄지어 있었다. 영미권에 한정되지 않은, 다양한 문화권의 식재료와 요리들이 뒤섞여있는 점이 독특했다. 이는 밴쿠버 여행 내내 느낄 수 있는, 밴쿠버의 특징 중 하나였다.

그랜빌아일랜드에는 그랜빌아일랜드브루잉(Granville Island Brewing)이라는 정직한 이름의 양조장이 있다. 펍도 같이 운영하고 있어, 간식으로 맥주 한 잔 해결할 요량으로 미리 확인해뒀던 곳이다. 막상 가보니 제법 유명세가 있는지 사람이 너무 많아 맥주 찬스는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퍼블릭 마켓 북쪽에는 수변에서 간단한 음식을 먹거나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친구가 올 때까지 주로 여기서 바다 건너 밴쿠버, 펄스 크릭(False Creek)을 오가는 배들, 그리고 갈매기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바로 근처가 시장에 어선 들어오는 항구라 그런지 갈매기가 유독 많았다. 갈매기와 관련된 안내나 경고가 많은 것도 신기했다.

Go Fish @18:00

저녁이 되자 날이 슬슬 개고 햇빛이 나기 시작했다. 저녁이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대낮 같다. 한국보다 위도가 높다보니 서머타임 중인데도 시간대에 비해 해가 길게 느껴진다.

퇴근한 친구를 만나, 동네 어부들에게서 생선을 직접 사서 쓴다는 피시앤칩스 집에 저녁을 먹으러 왔다. 친구가 강력히 추천하는 맛집이란다. 불과 한 달 전에 런던에서 피시앤칩스 먹고 왔던지라, 캐나다의 피시앤칩스는 어떤지 궁금하기도 했다.

생선은 대구(Cod)였는데, 영국에서 먹었던 것과 좋은 의미로 비슷했다. 바삭하고 기분 좋게 기름지고 간도 적당히 되어 있었다. 감자튀김은 평범했다. 영국 것은 감자가 아주 크고 두꺼운 대신 크리미했는데, 여기는 별 다른 특징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신 런던은 물론이고 밴쿠버 다운타운에 비해 가격이 저렴해 가성비가 좋았다. 자리를 잘 잡으면 강 건너 그랜빌아일랜드와 밴쿠버 다운타운을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도 있는데, 경치가 좋은 점은 장점이지만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는 음식이 바닷바람에 금방 식어버리는 건 단점이었다. 술을 안 파는 것 역시 큰 아쉬움이었다.

워터프론트역(Waterfront Station) @18:20

밴쿠버는 북미 도시치고 유독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는 편인 것 같다. 지하철 노선을 거미줄처럼 깔만큼의 인구 규모는 안 나오지만 대신 전철, 버스, 시버스를 조합해서 꽤 괜찮은 대중교통망을 구축해놨다. 여전히 많은 한계가 있지만 도심 지역이라면 대중교통만으로 둘러보는 게 가능해보인다.

저녁을 배불리 먹고서 친구와 같이 버스 타고 워터프론트역으로 왔다. 워터프론트역 근처 팀 홀튼에서 명물이라는 아이스캡(Iced Capp)을 한 잔씩 사서 마셨다. ($5.25) 맛은 외관에서 보이는 것 그대로 시원하고 달큰한 간식 거리였다.

워터프론트역에서 시버스를 타고 바다를 건너 노스밴쿠버의 론즈데일퀘이역(Lonsdale Quay Station; 현지인들은 ‘key’로 읽는듯)으로 왔다. 시버스 안에서는 다운타운, 가스타운(Gastown), 코울 하버(Coal Harbour)가 그리는 밴쿠버의 스카이라인을 즐길 수 있었다. 터미널이나 배 내부도 깔끔해서, 홍콩의 스타페리보다 나았다.

론즈데일퀘이역 근처 공원에서 친구 아내를 만나 아이스크림 먹고 산책하다 친구네 집으로 들어왔다. 동네 여기저기 공원이 잘 꾸며져 있고 날씨가 좋았던데다 남쪽으로 바다 건너 보이는 다운타운뷰와 북쪽으로 보이는 눈 덮인 산이 모두 보기 좋아 산책하는 즐거움이 좋았다.

저녁 파티를 위해 잠시 주류 판매점(BC Liquor Store)에 들러 술도 좀 사왔다. 캐나다는 주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한국보다 주류 판매가 아주 엄격히 통제됐다. 술은 주 정부 소유 공기업에서 직영하는 가게에서만 살 수 있고, 살 때마다 신분증을 두 가지씩 제시해야 했다.

대신 북미 서해안 아니랄까봐 엄청나게 많은 현지 술들이 있었다. 특히 현지 브루어리에서 빚었다는 크래프트비어가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고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대체로 홉향이 강한 에일류가 많았는데, 필스너나 밀맥주 역시 찾으려면 넘치도록 찾을 수 있었다.

친구집 @21:40

염치 불구하고 나흘씩이나 신세지러 왔음에도 친구네 부부는 반갑게 맞이해줬다. 사온 술과 이런저런 먹거리들을 곁들여가며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 이번 여행에서는 어디를 둘러볼지에 대해 신나게 대화를 나눴다. 특히 집에서 바다와 도시의 야경이 내려다보여 더욱 즐거운 시간이었다.

북미에서 호텔이 아닌 일반 가정집에서 묵어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확실히 한국과는 주택 구조가 달랐다. 가장 내밀한 공간인 침실은 문 두 개를 거쳐야 들어갈 수 있도록 다른 공간과 확실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욕실은 욕조 밖에는 물 빠지는 곳이 없어 친구가 미리 주의를 줬다. 현관 옆에는 게스트룸과 게스트용 욕실이 있어, 이번 방문에서 내가 지낼 수 있도록 내어주었다.

자기 전에 다음날 여행 계획에 대해 친구 부부에게 의견을 구했다. 역시 밴쿠버에 여행 왔으면 빠질 수 없는 스탠리파크를 돌고 다운타운 구경하다 친구가 퇴근하면 같이 저녁 먹는 걸로 정리가 됐다.


2019 캐나다 밴쿠버 여행


2019 밴쿠버 여행기 (5-9 Jun; 3박 5일)

여행의 이유


이번 여행은 아주 충동적으로 결정됐다. 때는 새로운 회사로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고 이직한지 반 년이 좀 넘었던 시점인 올 봄이었다. 불가해한 관행과 관습, 관성들로 가득찬 새 회사의 업무가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데다, 역시 어느 회사든 피해갈 수 없는 사람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어느날이었다.

마침 법정교육이 있어 회사 교육장에 앉아있었는데, 문득 창 밖으로 보이는 미세먼지 때문에 뿌연 하늘이 너무나도 처연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지금 내가 뭘 하고 있지’라는 회의감 가득한 시기였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러던 차에, 얼마 전에 만났던 몇 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아내와 밴쿠버로 간 대학 동기이자 입사 동기가 생각났다. 집안일 때문에 잠시 한국에 들어온 김에 만나 몇 번 밥을 같이 먹고 고민을 나누기도 했었는데, 최근 구입한 집에 있는 게스트룸을 내줄테니 밴쿠버로 놀러오라는 얘기를 여러 번 했었다.

교육장에 앉은 채 친구에게 밴쿠버에 놀러가도 되겠냐고 연락을 했다. 내가 밴쿠버에 가면 친구집에 며칠 얹혀지내는 것에 친구의 아내도 흔쾌히 동의해주었단다. 바로 밴쿠버행 항공권을 결제했다.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게 가능한 요즘 세상의 장점을 십분 활용한 셈이다.

그렇게 이번 여행은 충동적으로 결정됐다. 한국에서의 직장 생활에서 받고 있는 스트레스로부터 잠시 벗어나기 위한, 말 그대로의 도피성 여행이었다. 이 여행을 간다고 해서 내가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경감될 이유는 전혀 없다. 며칠 자리를 비울 뿐, 근본적인 환경이 바뀔리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때 당시에는 어떻게든 사무실 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만이 가득했다. 정말 필사적인 때였던 것 같다. 왕복에 걸리는 금전적, 시간적 비용에 비해 턱 없이 짧은 일정의 밴쿠버 여행은 그렇게 확정됐다.

여행 준비

항공권


항공권은 항공권 비교 사이트 두어 군데를 대충 검색해서 골랐다. 짧은 여행 일정을 최대한 활용하는 게 목적이다보니 직항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인천-밴쿠버간 직항 항공편은 대한항공과 에어캐나다에서 운항하고 있었다. 출발하는 날 휴가를 쓰지 않고 오전 근무만 한 후 오후에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는데, 에어캐나다보다 대한항공 쪽이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대처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에어캐나다 15:30, 대한항공 18:50)

숙소

하이시즌에 접어든 밴쿠버의 숙박비는 정말 비쌌다. 보통 숙박비로 하루 $100 정도를 기준으로 삼는데, 다운타운 쪽에 있는 호텔들은 대부분 $200 이상을 넘나들었다. $100 초반 정도에 맞추려면 랭글리, 코퀴틀럼, 리치먼드 같은 밴쿠버 광역권으로 나가야 했다.

다행히 이번 여행은 친구가 최근 구입한 콘도에 있는 게스트룸에 신세질 수 있었다. 덕분에 나중에 계산해보니 친구의 배려 덕에 상당한 여행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다.

여행 계획

이번 여행은 일정이 짧다보니 계획 역시 단순해질 수 밖에 없었다. 밴쿠버에서 좀 더 나가면 빅토리아, 휘슬러 같은 유명 관광지가 더 있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교통편은 차치하고서라도 시간이 없어 밴쿠버 도심 위주의 일정을 짤 수 밖에 없었다.

원래 여행 일정을 짜던 방법대로 처음 대강의 일정을 짰을 때는, 키칠라노에 있는 박물관들과 스탠리 파크에 있는 아쿠아리움에서 시간을 많이 보낼 계획이었다. 이후 친구의 조언을 거쳐 일정은 아래와 같이 조정됐다.

1일차

  • 오전: 밴쿠버 도착
  • 오후: 키칠라노 비치 – 그랜빌 아일랜드

2일차

  • 오전: 스탠리 파크
  • 오후: 다운타운 (잉글리시베이 비치, 차이나 타운, 가스타운 등)

3일차

  • 오전: 카필라노 서스펜션 브릿지 파크
  • 오후: 린 캐년 파크

4일차

  • 오전: 쇼핑
  • 오후: 출국

실제 여행에서는 쇼핑 욕구가 없어 4일차 오전이 휴식으로 대체된 것과, 저녁마다 친구가 웨스트밴쿠버와 딥 코브에 데려다준 것 말고는 계획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일정 자체는 꽤 만족스러웠다. 아쉬운 부분은, 밴쿠버 박물관을 못 간 덕에 밴쿠버의 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충분히 해소하지 못 했다는 것 정도다.

여행 비용

밴쿠버는 북미에서도 물가 비싸기로는 손꼽히는 도시다. 하지만, 여행자로서 잠시 머무르다 오는 입장에서는 한국 대비 그렇게까지 비싸다는 느낌은 받지 못 했다.

여행자로서 밴쿠버가 비싸다고 느낄 수 있는 건 숙박비와 교통비, 세금, 팁이다. 하이 시즌의 숙박비는 일 평균 $200를 쉬이 넘어간다. 하루 교통비를 DayPass로 해결한다고 보면, 내가 밴쿠버에 있을 당시 $10.25, 이 글을 쓰는 지금은 $10.50이니 대중교통만 타도 대충 하루 만 원씩이다. 소비세도 품목마다 차이가 있지만 한국보다 세율이 높고, 팁의 존재는 외식 물가를 더욱 올린다.

다만, 내 경우에는 숙박을 친구집에서 얹혀 지내는 걸로 해결하고, 하루 종일 걸어다니느라 식사도 대충 때운데다, 팁을 안 줘도 되는 상황이 대부분이었던 탓에 생각보다 지출이 적었다. 밴쿠버에 캐나다달러로 $300을 들고 갔는데, 특별히 돈을 아껴쓰지 않았음에도 3박 4일 동안 $120 남짓 밖에는 쓰지 못 했다. eTA 신청 수수료, 면세점에서 지출한 금액까지 모두 합쳐도 20만원이 채 안 됐다. 꽤 저렴하게 여행하고 온 셈이다.

그나마 가장 큰 지출은 카필라노 서스펜션 브릿지의 입장료였다. 비록 할인폭은 얼마 되지 않지만, 밴쿠버의 주요 관광지 입장료를 할인해주는 쿠폰이 있어 조금이나마 할인 받을 수 있었다.

여행 짐싸기



여행 짐 역시 평소 하던대로 준비했다. 원래는 20L 짜리 메신저백을 가지고 가려고 했는데, 게스트룸을 흔쾌히 내어 준 친구에게 전해줄 선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35L 백팩을 이용했다. 선물은 크기는 작았지만 액체류가 많아 따로 박스 포장해서 위탁 수화물로 보냈고, 그 외 짐들은 기내 반입했다.

위탁 수화물을 보내본 게 아주 오랜만이었다. 덕분에 인천에서 평소보다 수속에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캐나다 입국심사 줄이 워낙 길어, 위탁 수화물이 이미 나와 있어 짐 기다리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한국 돌아올 때는 모든 짐을 기내 반입해서, 빠르게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밴쿠버는 한국의 봄 날씨 정도에 비가 자주 온다는 이야기가 있어, 옷도 그에 맞게 준비했다. 일정이 3박 5일 밖에 안 되기에 속옷과 양말은 매일 갈아입을 수 있을 정도, 그 외 옷은 셔츠만 한 벌 더 여분으로 챙겼다. 여기에 보온 목적으로 메리노울 후드 집업, 방수 목적으로 얇은 윈드브레이커 재킷을 넣었다.

여행 일정 중 트래킹이 포함되어, 신발은 방수되는 경등산화를 신고 갔다. 비가 잦다보니 산길이 진흙탕이 된 구간도 있었는데, 제대로 된 신발을 신은 덕에 발 적실 일 없이 무사히 트래킹을 마칠 수 있었다. 친구네 집이 입식 생활일까봐 슬리퍼도 따로 챙겼는데 막상 가보니 한국처럼 좌식 생활로 꾸며져 있어 여행 내내 슬리퍼는 쓸모가 없었다.

여행 후기

캐나다 입국심사


캐나다를 비롯한 영미권 국가들의 입국심사는 악명 높다. 미국, 영국을 별 문제 없이 들락거린 경험이 있었지만 이번만은 좀 걱정이 됐다. 항상 왕복 항공권과 함께 준비했던 호텔 예약 영수증이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입국심사 때 친구집에서 지낼거라고 했더니 다양한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다행히 대답을 잘 했는지 서류 제시 요구 없이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밴쿠버

여행 일정이 짧아 밴쿠버의 많은 부분을 둘러보지는 못 했다. 다운타운과 키칠라노, 노스밴쿠버의 일부만을 본 정도였다.

짧은 견문에서 느껴진 건, 밴쿠버는 현대적으로 잘 꾸며진 시가지 바로 곁에 펼쳐진 광활하고 때묻지 않은 자연 환경이 장점인 도시인 것 같다. 특히 종일 흐리고 비가 와서 우울한 분위기의 겨울 대신, 화창하지만 덥지 않고 상쾌한 여름에 왔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낀 것 같다.


밴쿠버에서 가장 좋았던 곳은, 내 경우에는 린 캐년이었다. 평일 오후에 갔더니 인적이 드물어 한적한 가운데, 울창한 온대 우림 속에서 잘 정비된 산책로를 거니는 망중한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만약 다시 밴쿠버에 간다면 이번 여행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캐나다 서부의 산 속에서 산책하는데 할애하겠다며 굳게 마음 먹을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카필라노 서스펜션 브릿지 파크는 잘 꾸며놓았지만 역시 사람 손을 너무 많이 탄데다 관광객이 너무 많아 집중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스탠리 파크 역시 산과 바다, 도시를 한번에 즐길 수 있는 멋진 도심 공원이었지만 그 이상의 특별함은 느끼지 못 했다. 밴쿠버의 다운타운은 전형적인 북미 대도시다보니 내가 주로 관심을 갖는 역사성 같은 부분은 부족할 수 밖에 없는 곳이었다.

밴쿠버는 한국보다 꽤 고위도(북위 49도)에 위치한 곳이다. 그래서인지 한국보다도 해가 훨씬 길었고, 햇살도 훨씬 강하게 느껴졌다. 맑은 날은 물론이고, 흐린 날에도 선글라스를 쓰지 않으면 한국에 있을 때보다 눈에서 느껴지는 피로감이 더했다. 밴쿠버에는 편광 선글라스를 갖고 갔는데, 주로 수변에서 보냈던 시간이 길었다보니 효과가 좋았다.

밴쿠버는 북미 도시치고는 대중교통 시스템이 꽤 괜찮은 곳이었다. 데이패스 사용한다면 별 의미 없지만 무료 환승도 되고, 내가 가고 싶었던 목적지들을 대중교통만으로도 충분히 오갈 수 있었다. 버스나 전철 내부 역시 깔끔하고 청결하며 이용하기 쉬웠다.

밴쿠버는 상대적으로 아프리카계가 적은 대신, 아시아계 사람의 비율이 무척 높은 도시였다. 지금까지 여행 다니면서 노골적인 인종 차별을 당해본 적이 없긴 했지만, 밴쿠버에서 역시 짧은 체류기간 동안 별 다른 차별 받는다는 느낌 없이 즐겁게 여행할 수 있었다.

여행을 마치며


이번 밴쿠버 여행은 말 그대로 도피성 여행이었다. 밴쿠버에 갔다오고 나서도 한동안 업무적 압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아, 여전히 꽤 힘든 시기를 보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밴쿠버에서의 며칠은 일상으로부터 시공간적으로 확실히 분리되어, 그동안 지치고 찌든 머리와 마음에 확실한 휴식을 줄 수 있었던 시기였다. 특별한 결심이나 미래 계획을 세운 건 아니었다. 대신, 아무 생각 없이 서늘하고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바닷가를, 또 숲을 걷는 시간 자체가 좋았다.

특히 밴쿠버에서는 후각, 청각으로 느껴지는 자극이 기분 좋았다. 미세먼지 걱정 없이 깨끗한 공기가 그랬고, 머리에 쓴 윈드브레이커 후드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나 발 아래로 자갈이 밟히는 소리를 듣는 것 역시 그랬다. 내가 사는, 언제든 어디든 자동차와 사람으로 넘쳐나는 서울 도심에서는 느껴보기 힘든 순간이었다.

여기에, 역시 개인적으로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것도 기분 좋았다. 그동안 지내왔던 이야기들을 나눴던 시간이 즐거웠고, 집의 게스트룸을 기꺼히 내준 것이나 밴쿠버 여행에 대한 조언들, 맛있는 식당 소개, 내가 혼자라면 가보기 힘들었을 곳들에 자동차로 데려다준 것 모두가 고마웠다.


2019 캐나다 밴쿠버 여행


밴쿠버 여행 4일차 (8 Jun 2019, Sat): 밴쿠버-인천

친구집 @9:03

전날 음주량이 좀 과했던데다 늦게 잔 덕에 아침에 느지막히 일어나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오후 비행기인데다 오전에 다른 일정을 안 잡은 덕에 시간에는 여유가 있었다. 캐나다 올 때 내 짐의 1/3 정도를 차지했던 친구 선물이 가방에서 빠졌고, 대신 캐나다에서 산 게 아무것도 없다보니 가방에는 빈 공간이 많아 짐 싸기는 쉬웠다.

주말이라 출근을 안 하는 친구도 이내 일어나서 거실로 나왔다. 사이드 프로젝트로 무언가 진행하는 게 있다며 맥북을 꺼내 티켓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마침 거의 10년이 다 된 윈도우즈 랩탑을 맥북으로 바꿀지 말지 고민 중이던터라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결국 영업 당해버리고 말았다. 여행 복귀 후 얼마 되지 않아 맥북 프로를 구입했고, 지금 이 여행기도 맥북으로 쓰는 중이다.

공항 가는 길 @11:03


친구가 공항까지 데려다준다고 해서 같이 집을 나섰다. 공항까지만 가면 되니 자판기에서 신용카드로 싱글 티켓을 사서 시버스에 올랐다. 이후 캐나다 라인을 타고 공항으로 갔는데, 사람도 별로 없이 한산해서 별 불편함 없이 공항까지 갈 수 있었다.

내가 갖고 있던 컴퍼스 카드와 $180 정도의 현금은 친구에게 억지로 안겨줬다. 컴퍼스 카드는 워터프론트역이나 차이나타운에서 반납하고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데, 그러기가 애매했다. 매일 워터프론트역을 지나는 친구라면 보증금 환불 받든, 다른 용도로 사용하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현금은 생각보다 너무 많이 남았다. 입국심사 때 보유 현금을 물어볼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했고, 밴쿠버는 물가가 비싸니 하루 $100 정도 사용할 거라고 보고 $300을 환전해서 들고 왔는데, 절반도 채 쓰지 못 했다. 주로 걸어다녔던 탓에 교통비가 데이패스 본전도 못 뽑을 정도로 적게 들었고, 식사를 주로 푸드코트나 즉석식품으로 때운데다 생각보다 술을 희망사항만큼 많이 마시지 못했던 탓이다.

밴쿠버국제공항(Vancouver International Airport) @11:52

공항에 도착했다. 짐이래봤자 기내에 들고 탈 백팩 하나 뿐이니 체크인은 순식간에 끝났다. 이번 여행 내내 짐이 백팩 하나 뿐인걸 다들 신기해한다. 짐이 정말 그것 뿐이냐는 질문을 또 받았으니 말이다.


친구와 공항 Wendy’s에서 점심으로 햄버거를 같이 먹었다. 나는 ‘Dave’s Triple’을 주문했는데, 이름처럼 정말 패티가 세 장 들어있어 먹기 힘들 정도로 크기가 컸다. 맛 자체는 의외로 한국 패스트푸드와 크게 다를 게 없어서, 무난하다는 느낌이었다.

보안구역 앞에서 친구를 보내고 나는 에어사이드로 넘어왔다. 아내가 귀띔했던 것이 있어, 면세점에서 아이스와인과 메이플시럽을 샀다. 둘 다 밴쿠버 시내에서 샀으면 저렴했겠지만, 수화물을 위탁할 생각이 없었던 나에게는 액체류 기내 반입을 위해서는 공항 면세점 이외의 선택지가 없었다.


비행기 타기 전에 잠시 라운지에 들러 가볍게 요기를 했다. 비행기 타기까지 시간이 약간 남아있었는데, 마냥 라운지에만 앉아있기에는 시간이 아까워 공항 내부를 좀 돌아다녔다. 역시 입국 때 느꼈던 것처럼, 특히 흐르는 물과 자연을 소재로 꾸며진 내부가 편안한 인상을 주는 곳이었다.

KE072 기내 @14:38


인천에서처럼 장거리 비행을 위한 만반의 준비(안대, 목베개, 노이즈캔슬링 헤드폰, 메리노울 후드집업)를 하고서 비행기에 올랐다. 좌석에 준비된 물건들의 구성은 역시 올 때와 다를 게 없었다. (헤드폰, 베개, 물, 슬리퍼, 치약/칫솔 등)


인천에서 밴쿠버로 올 때는 늦은 오후에 출발해서 동쪽으로 가는 비행편이라 낮밤이 뚜렷해서 시차 적응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밴쿠버에서 인천으로 갈 때는 해를 따라 가는 낮 비행기이다보니 가는 내내 해가 지지 않았다. 한국에 도착하면 일요일 저녁이고, 바로 다음날 출근해야 하다보니 시차에 적응하려면 최대한 안 자고 버텨야만 했다.

KE072 기내 @15:40


기내식 서빙이 시작됐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특별기내식으로 과일식을 신청해두었다. 덕분에 밀타임 시작되자마자 가장 먼저 받아볼 수 있었다. 과일로만 되어 있다보니 먹을 떄나 소화시킬 때나 부담이 없었다.

KE072 기내 @19:47


14:40 출발하는 비행기였으니, 이제 5시간쯤 지났다. 딱 절반쯤 온 셈이다. 여전히 창 밖으로는 해가 보여서, 안 자고 버티는 데 도움이 됐다.

덥다 싶어 시계의 온도 센서를 보니 섭씨 22.8도란다. 분명 밴쿠버 올 때는 20도 정도에서도 추워서 후드를 뒤집어쓰고 담요를 덮어야 했는데, 지금은 후드를 벗고 셔츠 소매를 걷어올렸음에도 덥다고 느껴진다. 왜일까? 낮시간대 비행기라서?

여기저기서 라면 냄새가 난다. 런던에서 한국 돌아올 때도 그렇고, 유독 외국에서 한국 들어가는 비행기는 항상 라면 냄새가 진동을 한다. 다들 외국 음식을 버텨내기가 힘드셨던 모양이다. 먹어봐야 속만 부대끼고 전부 뱃살로 가는 컵라면에 무관심한 나로서는 좀 이해하기 어렵다.

인천국제공항 @18:03 (KST+1)

분명 10시간 짜리 비행인데, 토요일 이른 오후에 출발했는데 도착하니 일요일 저녁이다. 시차의 신비로움은 항상 체감할 때마다 할말을 잃게 만든다.

평소 하던대로 검역-입국심사-세관을 거쳐 나왔다. 이번에는 유독 빨라서, 비행기에서 내린 후 입국장 빠져나오기까지 10분도 채 안 걸렸다. 입국심사는 무인보다 유인이 오히려 더 빨랐고, 위탁수화물이 없으니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게 결정적이었다.

집 @19:20 (KST +1)

집이다. 내가 밴쿠버에 가 있는 동안 이탈리아에 있었던 아내는 나보다 몇 시간 먼저 귀국해서 집에 먼저 와있었다. 밴쿠버에 있는 동안 아침 저녁으로 친구가 잘 챙겨주었지만, 그래도 역시 집에서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아주 짧고도 밀도 높은 여행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3박 5일 일정이었는데, 실제로 순수히 여행에 주어진 시간은 이틀 + 한 나절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 중 하루는 밴쿠버 다운타운에, 하루는 노스밴쿠버에, 마지막 한 나절은 키칠라노와 그랜빌 아일랜드에 아주 알차게 썼다. 꼭 해야 할 것 위주로 아주 알차게 여행했다는 친구 아내의 평이 있기도 했다.

특히 아기자기한 도심과 광활한 대자연, 달콤한 날씨 아래서 재밌게 놀고, 맛있게 먹고 또 그동안 잊고 지냈던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2019 캐나다 밴쿠버 여행


런던 여행 8일차 (11th May 2019, Sat): 런던-인천


2019 런던 여행


Doubletree by Hilton Chelsea @7:56 (BST)

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챙겼다. 나와 아내 둘 다 영국 올 때보다 조금씩 짐이 늘었다. 나는 추위를 이기지 못 해서 구입한 바버 재킷 때문에, 아내는 포트넘&메이슨 등에서 구입한 선물들 때문이다. 다행히 둘 다 가방에 여유가 있어서, 짐 싸기 어렵지 않았다.

Peak Design Travel Backpack

여느 유럽 도시가 그렇듯이, 런던도 바퀴 달린 캐리어 가방으로 다니기 만만치 않아보였다. 다른 도시들의 장애물이 코블스톤이라면, 런던에서는 유독 좁은 인도와 튜브역을 오르내리는 수많은 계단이 캐리어 가방 사용을 힘들게 한다.

이번 여행에서는 짐가방으로 Peak Design의 Travel Backpack 45L, 보조가방으로 Peak Design의 Everyday Sling 5L를 각각 사용했다. 둘 다 몸에 잘 고정되어 기동성 있게 움직이기 좋고, 메고 벗기 편하고, 방수에 충실해서 비가 잦은 영국에서도 소지품을 잘 지켜줬다. 백팩은 대한항공과 영국항공 모두의 기내 반입 기준을 충족해서, 굳이 수화물 위탁할 필요가 없었다.

체크아웃 전 호텔 조식을 마지막으로 먹었다. 막날에서야 말로만 듣던 영국의 명물, 마마이트가 식당에 구비되어 있는 걸 발견했다. 호기심에 집어들어 식빵에 아주 얇게 발라 먹어봤다. 묘한 시큼함에 강렬한 단짠, 감칠맛이 몰려왔다. 익숙한 맛은 아니지만, 어울리는 음식에 곁들이면 맛을 더욱 돋구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Tesco Express, Imperial Wharf @8:54 (BST)

호텔에서 나와 바로 옆 테스코 익스프레스에 음료수를 사러 갔다. 사실 음료수가 꼭 필요한 건 아니었는데, 파운드화 잔돈이 어중간하게 남아있어 모두 털어내기 위함이었다. 치열한 고민 끝에 몇 가지 음료수를 조합해서 동전 하나 남기지 않고 파운드화를 깔끔하게 다 털어낼 수 있었다. (£2.47)

영국 히드로 국제공항 @10:18 (BST)

패딩턴 역을 떠나는 히드로 익스프레스 안에서

호텔 근처 임페리얼 워프역에서 튜브로 패딩턴역으로 와서, 히드로 익스프레스를 타니 순식간에 공항에 도착했다. 피카딜리선 타는 것보다 가격은 좀 비싸지만 역시 좌석이 편하고 넓고 조용해서 좋았다.

공항에서는 위탁할 수하물이 없다보니 줄 서지 않고 간편하게 셀프 체크인을 했다. 기계에서 인쇄되어 나온 항공권 재질이 너무 저렴해보여 공항에서의 재미가 좀 떨어지는 게 아쉬웠다.

바버 재킷 택스 리펀도 신청했다. 히드로 공항의 택스 리펀 창구가 줄이 긴 걸로 악명 높아서, 안 되면 에어 사이드에서 택스 리펀 신청할 생각이었는데, 막상 가보니 랜드 사이드에도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보다 먼저 온 중국 사람은 서류 작성을 안해놔서 담당자와 한참 실랑이 중이었는데, 나는 호텔에서 미리 서류 준비를 다 해온 덕에 금방 절차를 마칠 수 있었다.

택스 리펀을 현금으로 받으면 또 귀찮은 파운드화가 생기는데다 추가 수수료가 있어 신용카드로 신청했는데, 5월 11일에 신청한 택스 리펀이 6월 25일에 카드 일부 승인취소 형태로 완료됐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 처리는 정상적으로 되어 다행이다.

입국 때보다는 훨씬 간단한 보안 검색을 통과하고 출국장으로 들어서면 난민촌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공항 중 하나 답게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앉을 자리조차 잡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저런 가게들도 많았는데, 특히 해리포터 샵이 눈에 띄었다. 킹스크로스역에서 들렀던 9 3/4 정거장 샵과는 물건 구색이 미묘하게 달라서 또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위스키의 나라 답게 면세점에는 위스키가 아주 다양하게 갖춰져 있었다. 특히 처음 보는 위스키가 많아 눈 호강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BA 17 기내 @12:12 (BST)

오는 길은 대한항공 일등석이었는데 가는 길은 영국항공 이코노미석이다. 어마어마한 간극이 느껴진다. 대신, 영국항공 이코노미석은 마침 런던 착발 항공편에 대한 마일리지 발권 50% 할인이 있어 원월드 마일리지 이용해서 저렴하게 발권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말고 마스크를 당기세요

누가 영국항공 아니랄까봐, 기내 안내방송에 유명한 영국 배우들이 많이 나온다. 마이클 케인 경을 보고서는 너무 황송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재밌는 경험이었다.

승무원들은 대체로 연세 지긋한 분들이셨다. 한국 항공사 승무원들의 나긋나긋한 서비스도 좋지만, 무거운 짐을 번쩍번쩍 들어올리거나 기내 난동자를 제압할 수 있는 강인한 팔뚝을 가진 승무원 쪽이 왠지 좀 더 안심이 된다.

바로 뒷자리에는 한국 여자분 여럿이 탔는데, 비행기 타자마자부터 몇 시간 동안이나 쉬지 않고 수다를 떠는 통에 편안한 비행에 많은 방해가 됐다.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했다. 어쩜 저렇게 남의 얘기를 몇 시간 동안이나 쉬지 않고 할 수 있을까.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륙하자마자 음료 서비스가 먼저 시작됐다. 아내와 같이 영국 맥주를 외친 끝에 스코틀랜드 브루어리인 브류독(Brewdog)의 캔 맥주를 받을 수 있었다. 영국항공과 콜라보한 제품이었는데 ‘Transatalantic IPA’라니, 비록 인천 갈 때는 대서양을 건너지 않지만 네이밍 한 번 신박했다. 맛도 깔끔하고 좋았다.

BA 17 기내 @18:34 (BST)

이제 절반쯤 왔다. 아무래도 완전히 다리 뻗고 누울 수 있었던 일등석에 비하면 많이 불편하다. 그래도 기내식(토마토소스 파스타)가 영국 요리의 악명이 무색하게 꽤 괜찮았던데다 양도 다 먹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푸짐했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매그넘 초콜릿까지 나눠줬는데, 나는 안 먹었지만 아내 말로는 맛있었단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사방에서 라면 냄새가 진동한다. 대체 왜 기내에서 굳이 컵라면 서비스를 하는걸까. 나도 평소에는 라면 좋아하지만, 맵고 기름진 냄새를 맡으니 속이 메슥거렸다. 그렇게 푸짐한 기내식에 간식까지 먹고서 컵라면을 또 드시는 분들이 참 대단해보이기도 했다.

인천국제공항 @7:55 (KST+1)

드디어 한국에 도착했다. 위탁 수하물 없이 기내 수하물만으로 하는 여행의 장점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비행기에서 내려서부터 입국장을 나오는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여기에 한 번 맛들이고 나면 다시는 수하물을 위탁할 수 없게 된다.

일정이 생각보다 길지 않아 아주 밀도 높고 빡빡하게 다녀온 영국 여행이었다. 특히 영국 날씨를 만만히 보고 옷을 얇게 입고 갔다 제대로 감기가 들어 여행기간 내내 고생한데다 예상치 못한 큰 지출(바버 왁스재킷)이 생기기도 했다.

그래도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스톤헨지와 대영박물관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도시인 런던 시내를 걸어서 또 버스를 타고 돌아보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대도시의 독특함을 느껴볼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런던 여행 7일차 (10th May 2019, Fri): 사우스 켄싱턴(자연사/과학/V&A 박물관-하이드 파크)


2019 런던 여행


Doubletree by Hilton Chelsea @8:25 (BST)

런던 여행의 사실상 마지막 날이다. 다음날이면 오전 중에 짐 싸서 공항으로 가야한다. 바깥 날씨는 여전히 흐리다. 런던 온 이래 처음 며칠 빼면 맑은 날씨 본 때가 정말 손에 꼽는 것 같다.

호텔 조식을 매일 같이 먹다보니 물리는 느낌이 든다. 지금까지 여행이나 출장 다니면서도 호텔 조식에 만족해본 적은 몇 번 없긴 한데, 이번에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게다가 굳이 꼬박꼬박 챙겨먹었기까지 했으니 당연히 물릴만도 하다.

베이컨은 소금 뿌린 삼겹살 같아서, 기대했던 달콤한 훈연향을 느끼기 어려웠다. 소시지와 해시 브라운도 그저 그렇다. 그나마 시큼하고 달짝지근해서 어디에나 잘 어울리는 HP 소스를 곁들이니 먹을만 했지만, 대신 소스맛 밖에 나지 않았다는 게 함정. 버진 메리는 시큼하고 짭잘했다.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았다.

스탬퍼드 브릿지 앞 (Stamford Bridge) @9:56 (BST)

이날은 사우스켄싱턴에 나란히 위치한 박물관 세 곳에 가보기로 했다. 자연사 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 과학박물관(Science Museum),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Victoria and Albert Museum)이 그곳이다. 사실 하루에 다 보기는 힘든 곳이지만 여행 일정이 부족해서 약간 무리를 하기로 했다.

원래 목표는 오전에 자연사 박물관, 오후에 과학박물관, 저녁에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을 보는 것이었다. 매주 금요일마다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이 22시까지 연장 개관을 하기 때문에 잡은 일정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금요일 야간에는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의 극히 일부 전시관만 개방됐다. 홈페이지에도 지나가듯 언급되어 있었는데, 잘 못 보고 지나친 탓이었다.

호텔에서 나와 버스 타러 갔는데, Citymapper가 알려준 정류장이 마침 스탬퍼드 브릿지 바로 앞이었다. 전날 유로파리그 경기가 있었던 곳인데, 그래서인지 방송사에서 리포트를 녹화하는 모습도 보였다.

런던 와서 길 찾는 데는 구글맵과 Citymapper를 같이 사용하고 있다. 구글맵은 주로 식당 같은 장소에 대한 평이나 길 찾는 데 쓰고, Citymapper는 ‘여기에서 저기까지’ 가는 방법에 대한 안내를 받는 데 썼다.

특히 Citymapper는 튜브 공사 정보가 빠르게 반영되고, 탑승 중 목적지가 다가오면 미리 알림을 띄워주어 편했다. 실시간으로 GPS를 쓰니 배터리 소모가 컸지만 충분히 감수할만한 편리함이었다.

Natural History Museum (자연사 박물관) @10:20 (BST)

자연사 박물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아름다운 건물 외관이었다. 멀리서 본 자연사 박물관 건물은 마치 거대한 독일식 궁정 건물 같아보였다. 가까이 다가서면, 여러 동식물의 모습이 빼곡히 세공된 부조물이 눈에 띈다. 여느 장식 하나 허투로 만들어지지 않으면서도 건물의 목적을 뚜렷이 나타내는 점이 인상 깊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기부 창구를 지나 로비로 들어서면,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대왕고래(Blue whale)의 거대한 골격이 위압감과 함께 경의로움을 느끼게 했다. 로비 양측에는 마스토돈, 공룡 화석, 운석, 산호, 청새치 등 자연사 박물관에서 다루는 주제를 상징하면서도 흥미를 강하게 잡아끌 수 있는 전시물이 하이라이트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역사가 19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박물관이지만, 많은 전시물들이 21세기의 눈높이에 맞게 잘 관리되어 둘러보기 좋았다. 특히 공룡관은 마치 다크라이드를 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로 흥미로운 구성이었다. 일부 오래되어 보이는 전시관도 있었지만, 내용을 읽어보고 즐기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자연사 박물관이라는 공간 자체가 대부분의 성인에게는 흥미끌 만한 요소가 별로 없기는 하다. 대신 아이들이 보기에는 정말 구성이 잘 되어 있었고, 이런 전시물을 둘러보는 걸 좋아하는 나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날 자연사 박물관에서는 세 시간 정도 머물렀다. 이 정도 시간으로는 당연하게도 모든 전시실을 다 볼 수 없어서, 블루존 전부와 그린존, 레드존 전시 중 관심가는 곳 몇 군데를 꼽아서 둘러보는 선에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레드존은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로도 갈 수 있지만, 1층 Earth Hall에서 스테고사우루스 화석 옆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는 경로가 더 나은 것 같다. 체력을 아낄 수도 있고, 에스컬레이터가 관통해서 지나가는 구조물이 꽤나 멋지기 때문이다.

평일 오전에 방문했는데도 사람이 아주 많았다. 특히 아이들이 아주 많아서, 특히 공룡관 같은 곳은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아이들이다보니 시끄럽기도 해서, 시간을 들여 전시물을 깊이 감상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박물관은 규모가 크고 동선이 복잡해서 길을 헤매기 딱 좋은 구조다. 지도를 무료로 주면 좋겠는데, 지도나 가이드북은 유료인데다 한국어는 제공되지 않는다. 대신 홈페이지에서 제공되는 PDF 파일로 된 지도를 이용하면 그나마 편리하게 돌아다닐 수 있다.

The Kitchen @13:28 (BST)

점심은 자연사 박물관 1층의 키친에서 크림티 세트 2인분을 주문해서 먹었다. (£13.60) 대영박물관보다는 아주 약간 못하다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박물관 안에서 먹는 식사치고는 꽤나 만족스러웠다. 특히 영국에서 먹는 클로티드 크림의 맛이 신기하게 좋아서 크림티 먹는 재미가 있었다. 여기 말고도 박물관 안에는 간단한 식사나 간식을 파는 곳이 있어, 시간만 충분하다면 하루 종일 죽치고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과학박물관 (Science Museum) @14:21 (BST)

자연사박물관 바로 북쪽에 위치한 과학박물관은 이날 방문한 다른 박물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지 않았다. 대신, 전시물의 밀도가 굉장히 높아 제대로 둘러보려면 다른 박물관들 못지 않게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과학박물관 역시 1층(Ground Floor)에 방문자의 흥미를 끌기 좋은 상징적인 전시물들이 전진배치되어 있었다. 증기기관, 방직기, 애플 1, DNA 나선구조, 브롬톤 자전거 등 현대 과학기술 분야의 발견과 발명을 나타내는 다양한 전시물들, 그리고 우주 탐사에 실제로 사용되었던 장갑이나 우주선 모듈을 보다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된다.

산업혁명의 고향인 영국답게 산업혁명 시기의 전시물이 아주 훌륭했고, 합리주의 시대와 항공우주 분야의 전시 아주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인터액티브 프로그램도 꽤 많았는데, 특히 영어로 소통이 가능한 아이들에게 좋아보였다.

원래는 좀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정성껏 둘러보려고 했는데, 역시 오늘 일정이 너무 빡빡했던데다 자연사 박물관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써서 서둘러 나올 수 밖에 없었다. 특히 4층(Floor 3)의 시뮬레이터 체험을 못 해본 게 아쉽다.

엑시비션 로드 (Exhibition Road) @15:43

과학박물관과 V&A 박물관 사이 익시비션 로드 길가에 있는 벤치에 잠시 앉았다. 자연사 박물관 못지 않게 과학박물관에서도 많이 돌아다녔더니 다리에 피로가 쌓였다. 마침 날씨가 개어 하늘에서 해가 나기 시작했고, 길거리에서는 비누방울 거리공연도 한창이었다. 짧은 휴식이었지만 여유로운 오후였다.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Victoria and Albert Museum) @16:02

이날 V&A 박물관을 맨 마지막 방문지로 잡은 건 이유가 있었다. 매일 17:45까지 개관하지만 매주 금요일에는 22:00까지 개관한다는 안내를 V&A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봤기 때문이었다. 저녁을 좀 많이 늦게 먹는다면, 오후 늦게 방문해도 V&A 박물관을 둘러보기에 시간이 꽤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잘못된 생각이었다. 분명 V&A 박물관은 금요일에 22시까지 열긴 열었다. 단, 17:45면 지하, 1층, 그리고 3층 전시실 중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전시실을 닫아버린다. 상설전시를 제대로 보려면 금요일에도 17:45까지는 관람을 마쳐야 한다고 보는 게 맞겠다.

어쨌든 V&A 박물관은 생각보다 아주 거대한 곳이었다. 자연사 박물관과 과학박물관을 합쳐놓은 것 같은 크기였는데, 기나긴 회랑을 따라 지하(Floor -1)부터 5층(Floor 4)까지 다양한 연대와 분야에 걸친 엄청난 양의 전시물들이 있었다.

SOFT Brexit or HARD Brexit?

대영박물관에서 로마, 비잔틴, 중세 유물이 생각보다 적다고 생각했는데, 딱 그 시대의 각종 미술품들이 V&A 박물관에는 넘쳐났다. 엊그제 내셔널 갤러리에서 회화로 본 그 시대 그 장면들을 V&A 박물관에서는 조각과 직물, 건축물로 볼 수 있었다. 기념품 가게도 독특한 것이 많아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제대로 보려면 여기도 대영박물관 못지 않게 적어도 하루 이상을 온전히 투자해야만 할 것 같다. 그만큼 전시물이 많고, 또 꼼꼼하게 읽어볼만한 거리도 많았다. 개인적으로도 영국에 와서 본 박물관 중에서는 대영박물관만큼이나 V&A 박물관이 손에 꼽을만큼 좋았다.

어마어마한 양의 귀금속들

다만 방문 시간을 잘못 맞춰 보고 싶었던 전시관의 절반도 채 보지 못 했다. 지하층의 중세와 르네상스 미술품들, 1층의 주요 전시들, 3층의 어마무시한 양의 은세공품들을 보는 정도 밖에는 할 수 없었다.

V&A 박물관 역시 내부 구조가 복잡해서 지도 없이는 길 잃고 헤매기 딱 좋은 구조였다. 다행히 여기저기에 배치된 자원봉사자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셔서, 길 잃지 않고 무사히 잘 둘러보고 나올 수 있었다.

하이드 파크 (Hyde Park) @18:55

아쉬움을 뒤로 하고 V&A 박물관을 나왔다. 해가 많이 길어져서, 저녁이 되었는데도 아직 해가 훤했다. 런던에 온 이래 이날 오후가 가장 날씨가 좋아서 이대로 들어가기 아까워 바로 근처에 있는 하이드 파크로 걸어가서 산책을 하기로 했다.

금요일 저녁의 하이드 파크는 드문드문 인적이 있는 조용한 곳이었다. 일단 날씨가 정말 좋았고, 오래된 나무가 가득한 숲이 자연에 가깝게 아주 잘 꾸며져 있었다. 이런저런 동물들도 많이 보였고, 그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풀 향기, 꽃 향기가 그윽했다. 수시로 머리 위를 지나다니는 비행기만 아니면 망중한의 느낌도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이드 파크

잘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아내와 천천히 걸으며 런던 여행의 마지막날을 정리했다. 참 빠듯하고도 바쁘게 지내온 여행이었다. 아내는 연일 계속되는 강행군에 체력이 방전되어 힘들어했고, 나도 생각보다 추웠던 런던 날씨에 감기가 제대로 들어 꽤 고생을 많이 했었다. 여행의 마지막에나마 하이드 파크에서 숲과 물, 하늘을 보며 여유를 즐긴 건 정말 잘 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Memories of India Kensington @19:58 (BST)

런던에서 식당을 돌아다니며 독특하다고 생각했던 건, 세계 요리 전문점에 가면 대체로 그 나라 계통의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태리 식당에 가면 정말 남유럽계 사람들이 일하고 있었고, 인도 식당에 가면 역시 인도계 사람들이 서빙을 한다.

런던에서의 마지막 만찬은 인도 식당에서 하기로 했는데,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홀에서 바삐 돌아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인도계였다. 모두가 아주 쾌활하고 친절해서,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았다.

식당에서는 2인 메뉴(Menu for Two; Deluxe Platter)를 주문했다. 나중에 다 먹고보니 양이 어마어마해서, 둘이 아니라 셋이 먹어도 될 정도였다. 아주 배고픈 게 아니면 단품 조합으로 주문해도 될 것 같다.

가장 먼저 나오는 샐러드는 주로 오이에 고수 조합이었다. 나는 둘 다 좋아해서 에피타이저로서 아주 즐겁게 먹었다. 탄두리 치킨은 가슴살 부위였는데 보기보다 맵지 않고, 씹으면 안쪽에서 육즙이 터져나와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맛이었다.

토마토 기반의 양고기 커리는 이날 먹은 것 중에 가장 맛있었다. 양고기 특유의 냄새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쪽이 단순히 소스맛만 나는 게 아니라 다양한 맛과 복잡한 향을 즐길 수 있어 좋았다. 경단처럼 보이는 고기 덩어리는 좀 짜긴 했지만 다른 향신료향도 잘 배어 있어 밥이나 난에 곁들여먹으니 적당했다.

치킨 커리는 대체로 달짝지근하고 코코넛이 들어간 맛이 났다. 같이 들어간 야채에서는, 잘 우려낸 채수 같은 푸짐한 야채 특유의 감칠맛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밥와 난에 곁들여먹으니 정말 맛있었다.

밥은 인디카(안남미)였는데, 특유의 향과 날리는 느낌이 강했다. 역시 인디카 향에 거부감이 없다보니 맛있게 잘 먹었다. 인디카 향은 역시 한국 음식보다는 커리 같은 강렬하고 다양한 향신료가 가득한 동남아 음식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난도 쫄깃거리고 맛있었는데, 밥이 굉장히 많았던데 반해 난은 한 장 밖에 없어 좀 아쉬웠다.

다 먹고 나면 손 닦는 용도의 물수건과 후식 음료가 제공된다. 커피나 차 중에 선택할 수 있다. 이걸 마시고 있으면 오렌지 초콜릿이 또 나온다. 맛은 딱 제주 감귤 초콜릿이다. 정말이지, 먹거리가 끝도 없이 나와서 방심할 수 없었던 식사였다. (£49.95 + Service Charge 10%)

이날 식사에서 가지고 있던 파운드화 지폐를 남김 없이 다 쓸 수 있었다. 또 언제 영국에 올지 알 수 없는 시점에 남은 파운드화를 갖고 있기 싫었는데, 다행히 계산이 잘 맞아들었다. 다음날 남은 동전까지 깨끗하게 다 털어내고 깔끔하게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임페리얼워프역 (Imperial Wharf Station) @22:06

기나긴 식사를 마치고 호텔 근처로 돌아왔다. 금요일 밤이라 그런지 런던 시내는 늦은 시간임에도 행인도 많고 시끌시끌한 분위기였다.

호텔 바로 옆 Imperial Wharf역의 자동판매기에서 다음날 패딩턴역으로 가는 싱글 티켓을 신용카드로 샀다. 이날이 종이 위클리 트래블카드 유효기간 마지막날이어서 다음날 튜브 타려면 따로 티켓을 사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오이스터 카드를 사용하는 게 훨씬 저렴했다. 하지만, 바쁜 출국날 오이스터 카드 환불 받기도 귀찮았고, 환불 받은 파운드화 보증금 역시 처치곤란이라 그냥 싱글 티켓 끊는 쪽을 택했다. (£4.9 x 2명)

비용 결산

  • The Kitchen (Natural History Museum) £13.60
  • The Memories of India Kensington £55.00
  • TfL Single Journey Ticket £4.90 x 2명
  • 합계 £78.40

런던 여행 6일차 (9th May 2019, Thu): 웨스트민스터 (웨스트민스터 사원-IWM 처칠 워룸-옥스퍼드 서커스)


2019 런던 여행


DoubleTree by Hilton Chelsea @7:48 (BST)

호텔 창문으로 보이는 풀럼 지역의 아침

전날 비가 많이 왔었는데 이날 아침은 화창했다. 물론 이제 런던 날씨에도 조금씩 익숙해지던 터라, 언제든 거센 비바람이 불 수 있는 전제 하에 외출 준비를 했다. 방수 되는 가방과 신발, 이틀 전에 산 왁스 재킷을 챙겨입고 우산도 따로 챙겼다.

이날 오후에는 특히 비가 거세게 내렸고 바람도 많이 불었었다. 완전히 생쥐꼴이 된 사람들도 많이 봤는데, 나는 준비를 잘 했던 덕분에 발이 젖거나 추위에 떨지 않을 수 있었다.

런던 와서 걸린 감기는 아주 제대로여서, 약을 챙겨먹는 와중에도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았다. 특히 기침 때문에 밤새 잠을 잘 자지 못 했다. 그나마 전날 테스코 익스프레스에서 구입해서 쟁여놓은 생수 12병 덕분에 계속 물을 마시며 버틸 수 있었다. 나 뿐만 아니라 아내도 전날까지 워낙 많이 걸었다보니 힘들어했다.

그래서 이날 원래 계획대로라면 웨스트민스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후 숙소로 오는 길에 첼시에 있는 국립육군박물관(National Army Museum)에 들를 예정이었지만, 일정을 조정해서 국립육군박물관 대신 옥스퍼드 서커스에 잠시 들렀다 일찍 숙소로 돌아오기로 했다.

버스 타고 웨스트민스터 가는 길 @9:38 (BST)

계획대로라면 웨스트민스터 사원 입장 시작시간인 9시 전에 웨스트민스터에 도착했어야 했는데 출발이 늦었다. 나와 아내 둘 다 몸이 별로 좋지 못했던 탓이다.

종이 트래블카드가 계속 튜브 개찰구에서 인식이 안 된다. 덕분에 굳이 개찰구에 트래블카드를 인식시켜야 하는 튜브보다 기사에게 보여주면 그만인 버스를 더 선호하게 된다. 이날도 버스를 탔고, 윗층 덱 맨 앞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덕분에 가는 길에 런던의 평일 아침을 잘 둘러볼 수 있었다.

런던에 온 이래 적어도 도심에서는 오토바이를 거의 보지 못 했다. 대신 자전거가 정말 많았다. 대부분 헬멧을 쓰고, 교차로에서는 다들 수신호도 능숙하게들 했다. 자전거 중에서도 브롬톤이 꽤 많았는데, 다양한 마개조가 횡행하는 한국과는 달리 거의 순정 그대로 타는 걸로 보였다. 도로는 유독 폭이 좁아보였고, 로터리와 일방통행, 버스와 자전거 전용 신호 등도 자주 눈에 띄었다.

빅벤은 공사 중

원래 웨스트민스터에서 꼭 가봐야 할 곳 중 하나는 빅벤(Big Ben)이 딸린 웨스트민스터 궁전(Westminster Palace)다. 영국의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는 건물인데, 워낙 낡고 위험해 수 년 간에 걸친 공사가 진행 중이라 외부를 제대로 보기 어려웠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가는 길에 잠시 스쳐지나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의회가 열리지 않는 토요일에는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일부가 외부인에게 개방되는데, 이번 런던 방문 일정이 토요일에 들어와서 그 다음주 토요일에 나가는 일정이라 시간이 맞지 않아 방문을 못 했다. 특히 BBC PMQ(Prime Minister’s Questions)를 즐겨봤던 터라 그 현장을 직접 보고 싶었는데 보지 못해 아쉬웠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Westminster Abbey) @10:17 (BST)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입장 개시 전에 미리 도착해서 줄 서 있으려고 했는데, 조금 늦게 도착했더니 아주 긴 줄을 만났다. 소매치기가 많은지 대기열 근처에 주의 표시가 여기저기 서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고딕 양식의 건물 외장도 아주 멋져서, 줄 서 있다 경치에 정신 팔려 있다 보면 주머니를 털려도 쉬이 알아채기 어려울 것 같다.

줄 서 있는 동안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분명 아침에 나올 때는 화창했었는데, 역시 런던 날씨의 변덕스러움은 어디 가지 않는다. 우산 대신 재킷의 후드를 뒤집어쓰고 버티다 보니 어느새 입장할 수 있었다. 입장료는 2-for-1 바우처를 이용해 반값 할인을 받았다. (£23.00) 줄 서 있는 동안 바우처의 빈칸을 미리 채워두었더니 금새 처리가 됐다.

입장료에 포함된 멀티미디어 가이드는 한국어도 지원한다. 왠지 한국어 가이드 화자가 외국인인듯 특이한 억양이었다. 알아듣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 무엇보다 다른 곳들의 오디오 가이드와 마찬가지로 내용이 충실해서 마음에 들었다.

사원 내부는 사원 외부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고딕 양식의 아름다움을 한껏 만끽할 수 있는 구조였다. 여기에 다양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성화, 목조 구조물들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많았던 건 무덤이었다. 세인트폴 성당에도 무덤이 많았지만,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시선 가는 곳마다 무덤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잉글랜드 왕가의 무덤처럼 크고 넓은 자리를 차지한 것도 있었고, 성당 바닥에 박힌 묘석이 그간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취 덕에 닳고 닳아 거의 알아볼 수 없는 것들도 많았다.

그 중에서도, 굳이 멀티미디어 가이드의 도움을 빌리지 않더라도 아이작 뉴턴, 윌리엄 톰슨(캘빈 남작), 폴 디랙, 어니스트 러더퍼드, 조지프 톰슨, 마이클 패러데이, 제임스 맥스웰, 스티븐 호킹 등 물리학 거장들의 무덤 또는 명판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들의 업적 위에 현대 과학이 우뚝 서있듯, 그들이 묻힌 자리를 뒷세대 사람들이 찾아와 추모하며 영감과 동기부여를 받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은 전쟁 전몰자들의 이름을 눈에 잘 띄는 곳 여기저기에 많이 남기고 또 기려준다는 인상을 받았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웨스트민스터 내에서 유일하게 발에 밟히지 않는 장소로 알려진 무명 용사의 무덤 외에도, 참전 군인들을 기리기 위한 곳들이 꽤 눈에 자주 띄었다.

멀티미디어 가이드를 따라가는 투어는 한 시간 정도 걸렸다. 멀티미디어 가이드에 포함되지 않은 공간들을 추가로 둘러보는 시간과, 줄 서는 시간까지 총 두 시간 정도면 여유 있게 둘러볼 수 있을 것 같다.

투어 중에는 화장실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없으며,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그럼에도 카메라를 꺼내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동아시아계였는데, 왜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지 모르겠다.

Osteria dell’Angolo @12:45 (BST)

웨스트민스터역에서 마셤가(Marsham Street)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찾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구글맵이나 트립어드바이저 등에서 보기로는 가격이 꽤 비싸지만 돈값하는 곳이라고 했는데, 먹어보니 틀린 평이 아니었다.

식전빵이 꽤 넉넉하게 나왔는데, 같이 나온 올리브 오일의 질이 아주 좋아서 기대가 더욱 높아졌다. 이어 나온 파스타들도 아주 훌륭했다. 메뉴판이나 영수증 사진을 찍어두지 않아 정확한 메뉴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토마토와 치즈의 강렬한 맛이 휘몰아쳐서 강렬한 감칠맛을 혀에 남겼다. 파스타는 핸드메이드로 만든다고 했는데, 노른자로 반죽한 생면 특유의 맛과 식감을 한껏 즐길 수 있었다. (£32.51, Service Charge 12.5% 포함)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 처칠의 전시내각 박물관 (IWM Churchill War Rooms) @13:51 (BST)

점심 식사 후, IWM 처칠 워룸으로 향했다. 식사하러 남쪽으로 꽤나 내려왔는데, 처칠 워룸은 웨스트민스터 사원 근처라 다시 북쪽으로 걸어 올라가야 했다.

런던에서는 방수가 정말 절실하다

점심 먹는 동안 반짝 맑았던 날씨가 다시 험악해지며 비를 어마어마하게 쏟아냈다. 처칠 워룸 앞에 길게 늘어선 입장 대기줄 때문에 비를 쫄딱 맞으며 기다려야만 했다. 그나마 작은 우산과 방수되는 외투, 가방, 신발을 잘 챙겼던 덕분에 큰 불쾌함 없이 기다림의 시간을 젖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다.

처칠 워룸에서도 2-for-1 바우처를 사용해서 한 명치 입장료로 두 명이 입장할 수 있었다. (£22.00) 입장료에는 오디오 가이드 포함되어 있다. 다만 한국어는 지원되지 않는다. 대신 영어 가이드를 들었는데, 비교적 느리고 또박또박하게 읽어주어 알아듣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각 전시물마다 설명도 충실히 붙어있었다. 간단한 요약을 보고 싶을 때는 전시물의 설명을,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을 때는 오디오 가이드를 주의 깊게 들어보는 쪽이 도움이 됐다.

전시물은 2차대전사 또는 윈스턴 처칠 개인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아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 윈스턴 처칠 개인에 대한 내용도 아주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었고, 2차 대전기 중 실제 영국 전쟁 내각의 다양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오디오 가이드를 적당히 들어가며 둘러보는데는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아내가 많이 힘들어해서 조금 서둘러 나왔는데, 오디오 가이드의 내용을 모두 들어가며 충분히 또 꼼꼼히 즐기려면 두세 시간 이상 잡아야 할 것 같다. 윈스턴 처칠에 관심이 있다면 영상이나 연설 등을 듣는데 시간이 훨씬 더 많이 걸릴 수도 있겠다.

옥스퍼드 서커스 (Oxford Circus) @15:52 (BST)

처칠 워룸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옅게 흩날리고 있었다. 우산을 쓰기도, 안 쓰기도 애매한 그런 날씨였다.

원래는 국립육군박물관(National Army Museum)에 갈 예정이었지만, 나는 감기가 심했고 아내는 체력이 방전되어 오늘의 박물관 투어는 여기까지만 진행하기로 했다. 대신, 길거리나 가게들을 가볍게 둘러보고 저녁도 먹을 요량으로 버스를 타고 옥스퍼드 서커스로 갔다.

날씨가 꽤 궂은데도 옥스퍼드 서커스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런던에서도 손꼽히는 번화가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을만큼 번화하고 다양한 상점들이 성업 중이었다. 뉴욕 타임스퀘어의 전광판만큼 유명한 옥스퍼드 서커스의 전광판 역시 이날 또 구경할 수 있었다.

한참 거리를 둘러보다 셀프릿지스 런던(Selfridges London)에 들어갔다. 런던에서도 손꼽히는 백화점 중 하나라고 하는데, 하이엔드 브랜드 가게들이 많았다. 중국인과 한국인이 많이 보였는데, 다들 커다란 쇼핑백을 대여섯개씩 팔에 걸고 다니는 점이 신기했다.

쇼윈도도 단순히 상품만 진열해둔 게 아니라 좀 더 명확한 주제를 표현하고 있었다. 특히 팻맥그라스랩(PAT McGRATH LABS)의 마치 철왕좌처럼 생긴 네온 장식물이 눈길을 끌었다.

Windmill Mayfair @17:07 (BST)

옥스퍼드 서커스에서 조금 걸어, 파이가 유명하다는 영국식 펍에 왔다. 런던에 왔으면서도 정작 펍에서 제대로 식사를 해본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그 전에 시도를 안 해본 건 아닌데, 보통의 음식점들과는 이용 방법이 다른데 따로 안내가 없다보니 그냥 헤매다 나오고 말았었다. 막상 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데 말이다.

가게에 들어가서, 가능하다면 빈 테이블 하나를 잡아놓고, 다양한 맥주 탭이 늘어선 카운터에서 메뉴판을 보고 바텐더에게 주문하고 바로 계산하면 그만이다. 테이블을 잡은 경우, 어느 테이블인지를 주문할 때 따로 알려주면 된다. 맥주는 카운터에서 바로 받아오면 되고, 음식은 준비되면 테이블로 서빙해준다.

주문은 섀퍼드 파이(Shepherd’s pie), 스테이크 버섯 파이(Steak and mushroom pie), 그리고 IPA 두 잔으로 했다. (£42.00) 맥주는 탭에서 따라준 걸 바로 받아왔고, 파이는 사이드, 소스와 함께 테이블로 따로 서빙됐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드문드문 빈 자리가 있었는데, 파이를 서빙 받을 때 쯤에는 실내가 사람으로 꽉 차서 아주 시끌시끌해졌다. 가게 안팎에 선 채로 맥주 마시는 사람들도 많았다. 영국식 펍이 이런 분위기이구나 싶어 아주 재미있었다. 이 와중에 실내는 금연이라 담배 피우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 역시 마음에 들었다.

섀퍼드 파이는 양고기였는데, 아주 고소한 맛이 아주 좋았다. 양 냄새는 약간 있었지만, 나는 양 냄새가 너무 없으면 서운하게 느껴는 터라 오히려 반가웠다. 스테이크 버섯 파이는 패스트리 안에 넣어 익힌 장조림 같은 맛이었다. 베이스로 와인이 들어간듯 조금 시큼한 느낌도 있었다. 각각 양 냄새와 시큼함에 너무 예민하지 않다면 한국 사람 입맛에도 무난할 것 같다. 파이 하나의 양은 성인 남성 한 명이 딱 적당히 먹을 정도였다.

사이드로는 칩스와 그레이비 소스가 나왔는데, 이 그레이비 소스가 아주 좋았다. 케첩과 브라운 소스도 같이 나왔었는데, 그레이비 소스가 워낙 좋다보니 손이 잘 가질 않았다. 여기에 탭 IPA까지 곁들여지니 아주 꿀맛 같은 저녁을 즐길 수 있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18:36 (BST)

기분 좋게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이다. 이번에도 종이 트래블카드 인식 문제가 번거로워 일부러 튜브 대신 버스를 탔다. 한창 퇴근 시간대라 길이 꽤 막혔다. 그래도 가능하면 버스 타는 게 더 좋은 것 같다. 밖이 보이고, 셀룰러 데이터가 비교적 잘 터진다.

호텔에 가까워지니 불을 훤히 밝힌 펍 몇 개가 눈에 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날 스탬포드 브리지에서 첼시와 독일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Eintracht Frankfurt) 간의 유로파리그 4강 경기가 있었다. 어쩐지 동네 골목마다 첼시 유니폼 입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펍에는 ‘Chelsea Fans Only’라고 써붙여놓기도 했더라니. 내가 첼시 팬이었으면 어떻게든 경기를 보려고 동분서주했을텐데, 축구에 관심 없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비용 결산

  • 웨스트민스터 사원 £23.00 (2-for-1)
  • Osteria dell’Angolo £32.51
  • IWM 처칠 워룸 £22.00 (2-for-1)
  • Windmill Mayfair £42.00
  • 합계 £11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