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맞이 영화 관람: ‘싱글 인 서울,’ ‘듄,’ ‘서울의 봄’

‘거미집’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극장에 가지 않았다. 이유는 많았다. 시간도 없고, 땡기는 영화도 없고, 극장까지 가기도 귀찮고.

그러다 연말을 맞아 극장에서 며칠 사이에 영화를 세 편이나 봤다. 휴가를 몰아써서 시간이 많았고, 마침 땡기는 영화도 있었고. 동기부여가 되니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한파에도 극장까지 가는 길도 어렵지 않았다.

‘싱글 인 서울’은 11월 말 개봉작이다. 흥행성적이 기대에 못미쳐 연말엔 보기 어려울 줄 알았지만 다행히 극장에서 볼 수 있었다.

‘듄’은 재개봉이다. 최초 개봉 때는 용산 아이맥스에서 봤었는데 큰 감동을 받고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다만 영화 초반 일부를 과민성 대장증후군 때문에 놓쳤었다. 아쉬움을 달래고자 왕십리 아이맥스에서 다시 보게 됐다.

‘서울의 봄’은 아마도 2023년 최고 흥행작이 될 것 같다. 이 글을 쓰기 며칠 전 이미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한창 관객이 많이 들 때의 북적임이 싫어 흥행세가 다소 진정된 다음 느긋하게 보러 갔다.

‘싱글 인 서울’: 관계맺기 서툴러도 괜찮아

큰 기대는 없었던 영화다. 주로 타임킬링용으로 소비되곤 하는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로는 작품성에 일정한 상방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지 이동욱 배우와 임수정 배우 둘 다 좋아하는 배우들이라 팬심으로 보러 갔다.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은 영화였다. ‘헤어질 결심’이나 ‘거미집’ 같은 몰입감은 없었다. 쉽게 눈에 띄는 개연성의 부족과 채 정리되지 않은 잔가지의 껄끄러움도 있었다. 그래도 대체로 흐뭇한 마음으로 즐겁게 보고 나올 수 있는 영화였다.

영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질문한다. 나는 언제 정말 나일 수 있을까. 혼자일 때일까, 그렇지 않으면 타인과 함께일 때일까. 영화는 함께 있어도 계속 나일 수 있는 타인과의 관계맺음을 모범답안으로 보여준다. ‘싱글 인 서울’이라는 영화가 결국 제목을 배반하고 마는 지점이다. 호불호가 갈릴 수 밖에 없겠다. 뻔한 결말일수도, 따뜻한 힐링일수도.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또 하나의 줄기는 변화다. 시간은 흐르고 사람은 변하고 기억은 왜곡된다.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 두 사람의 추억은 딴판이다. 영화는 이를 맞춰가는 과정을 통한 성장을 이야기한다. 그렇다. 관계맺음이 서툴러 얻은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한 방법도 관계맺음이다. 그 결과 남주는 과거의 서투른 관계맺음에서 받은 상처를 마침내 딛고 일어선다.

영화는 대체로 이동욱 배우가 분한 남주의 단기간 압축 성장 스토리에 가깝다. 여주를 포함한 많은 등장인물이 남주의 성장에 아낌 없는 조력을 제공한다. 대신 정작 영화 초반부터 꾸준히 그려지는 여주의 관계맺음에 대한 서투름은 개선되지 않은채 영화가 끝나버렸다. 남주와의 관계맺음이 있긴 했지만 과연 여주의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구체적인 성장 서사가 제시되는 남주와는 달리 여주는 그런 부분이 적으니 알기 어려웠다.

영화의 비주얼은 기대만큼 훌륭했다. 내용이야 어쨌든 비주얼만으로도 시간과 돈을 투자한 보람이 있었다. 이동욱 배우와 임수정 배우 모두 이 방면에서는 워낙 훌륭한 분들이라 보는 내내 눈이 호강하는 기분이었다. 그 외모로 연애에 흑역사만 쌓아왔다는 설정이 개연성에 있어 큰 흠이지만, 뭐, 영화니까.

서울과 파주의 여러 명소를 눈부신 색채와 감성 가득한 음악을 곁들여 담아낸 풍경 역시 아름다웠다. 서울시민이면서 파주 출판도시에 여러 번 가본 나도 여러 번 감탄할 정도였다. 잘 편집하면 한국 관광 홍보 영상으로 써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영화를 보면서 곁다리로 들었던 여러 생각도 적어본다.

  • 임수정 배우는 작중 커다란 안경을 쓰고 나온다. 그런데 안경 렌즈에 계속 여러 풍경들이 반사되어 보인다. 일부러 의도한 걸까? 무언가 알아차리기에는 구체적으로 반사된 이미지를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사실 반사방지 코팅이 된 안경을 쓰면 녹색이나 보라색 계열의 코팅 색상이 비칠테니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곤란할 것 같기도 하고.
  • 종이책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는 영화였다. 영화의 얼개는 남주가 쓴 글을 여주가 책으로 펴내는 과정이다. 책이 핵심 소재라 책에 대한 언급도 많다. 특히 여주가 얘기한 출판일을 하는 이유를 듣고 보니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나는 여러 이유로 전자책으로 갈아탄지 오래인데 이래서야 읽고 있는 책의 작가나 편집자를 마주칠 기회가 없겠구나. 그분들께 글일을 하는 보람을 드릴 수도, 내 책에 사인을 받을 기회도 없겠구나. 그렇잖아도 종이책이 주는 대체불가한 손맛이 그립던 차이기도 했는데. 어쩌지, 싶다.
  • 중간에 잠깐 등장하는 손지나 배우는 그야말로 신 스틸러였다. ‘더 글로리’의 소름 돋는 연기를 본 게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강렬한 잔상 때문에 처음 등장할 때는 잠깐이지만 숨이 멎는듯 했다. 하지만 이내 귀에 쏙쏙 들어오는 대사와 따뜻한 감정선 덕분에 길지 않은 신이었지만 즐겁게 볼 수 있었다.

‘듄’: 아이맥스에서 느끼는 스페이스 오페라

앞서 적었던 것처럼 ‘듄’은 두 번째 관람이다. 원작 소설도 여러 번 읽었던 터라 지난번 관람 때 놓쳤던 변화의 전령이 황제의 명령을 받는 장면 정도가 새로웠다. 거대한 우주선과 기묘한 복식의 방문자들, 어떻게 봐도 군국주의적 규율이 드러나는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등장인물을 통해 장엄한 영상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외에는 역시 지난 관람 때의 감상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특히 아이맥스에서 느끼는 칼라단과 아라키스의 풍경은 다시 봐도 굉장한 체험이었다. 스크린을 통해 만난 거대한 사구와 모래 물결은 신혼여행 때 남미의 사막을 직접 보며 느꼈던 압도감에 크게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여기에 한스 짐머 특유의 심연까지 쥐어박는듯한 음악은 역시 극장에서 타격감을 온몸으로 느낄 때 가장 즐겁게 즐길 수 있었다.

아주 잘 생겨서 찬탄만 나오던 레토 공작의 미모, 먼지 섞인 스파이스 좀 마셨다고 순식간에 환시를 보는 마약의 무서움, 원작에 비해 능력은 너프 먹고 입체성이 떨어지며 비슷한 표정만 짓곤 하는 레이디 제시카, 유명 배우들만 얼굴을 제대로 가리지 않는 사막복 착용 같은 것들은 그저 곁가지였다.

영화 시작 전 ‘듄 파트 2’ 예고편도 볼 수 있었다. 파트 1에서 ‘기-승’을 다뤘으니 이제 파트 2에서는 ‘전-결’을 다룰 차례다. 파트 1보다는 좀 더 극적인 장면이 많은 부분이라 기대가 크다. 역시 아이맥스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서울의 봄’: 피아 없는 병림픽 속 참담한 결과

한국 현대사 중 5공에 특히 관심이 많다. 5공은 탄생과 몰락 모두 참으로 드라마틱했던 정권이다. 그래서인지 5공을 다룬 영화만 해도 여럿 기억이 난다. 유신정권 말기의 권력 투쟁(‘남산의 부장들’), 갑작스런 대통령 유고(‘그때 그 사람들’), 신군부의 폭주(‘화려한 휴가’, ‘택시운전사’, ‘변호인’, ‘남영동1985’)에서 마침내 6월 항쟁(‘1987’)까지. ‘서울의 봄’은 그 중 12.12 군사 반란을 다룬 영화다. 불과 하룻밤 사이에 참으로 다양한 국면을 보여줬던 사건이기에 영화로서도 기대가 많이 됐다.

‘서울의 봄’은 2시간을 훌쩍 넘는 상영시간임에도 지루함 없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였다. 전개가 무척 빠르면서도 서울 안팎 다양한 곳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상황들을 여러 장치를 통해 조망해줌으로써 긴박하고 복잡한 상황에도 지치지 않고 몰입할 수 있었다. 도입부에서 보이는 이미 가치판단의 결과를 정해둔듯한 자막과 후반부의 신파를 제외하면 연출은 딱히 흠 잡을 곳이 없을 정도였다.

황정민 배우와 정우성 배우의 연기도 좋았지만 기대치가 높다 워낙 보니 조금은 아쉬웠다. 황정민 배우는 여전히 ‘신세계’의 정청, ‘달콤한 인생’의 백 사장, ‘수리남’의 전 목사가 겹쳐 보였다. 정우성 배우는 발성이 답답하다고 느꼈다. ‘제5공화국’ 드라마에서 김기현 성우의 벼락 같은 일갈이 아직도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다 보니 더욱 그랬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반란 당일 반란군과 진압군의 행보는 하나 같이 한심했다. 그럼에도 반란이 성공했던 건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하나회 형님 아우끼리 작당해서 가용 병력을 총동원한 반란군에 비해, 정규군으로서 지휘계통을 마냥 무시할 수 없었던 진압군의 입장 차이가 커보였다. 여기에 제주도를 제외한 부분계엄 상황에서 계엄사령관 부재 중 군을 통제해야 할 국방장군이라는 작자의 한심한 행태가 결정적이었다. 특히 육본 벙커를 버리고 수경사로 간 건 10.26 때 김재규가 중정 대신 육본으로 간 것에 맞먹는 오판이지 않았을까.

  • 전두광 부인의 주걱턱을 보자마자 나는 웃음이 터졌는데 생각보다 그 장면에서 웃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연령대는 꽤 높아 보였는데. 모두가 개그로 볼 수 있는 설정은 아니었나보다.
  • 후기 중 분노가 치솟는다는 얘기를 많이 봤었다. 내 경우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영화 막바지 전두광의 폭소가 영 보기 불편하긴 했다. 하지만 신군부에 대해 이미 감정 소모를 많이 해왔기에 특별히 더 화가 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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