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명가수영밀면 – 물밀면, 손만두 (20. 2. 15 업데이트)

명가수영밀면
2020년 2월 15일 토요일 저녁
물밀면(大) 7,000원, 손만두 6,000원

지난 2017년 5월 방문 후 거의 3년 만의 재방문입니다. 그 동안 부산 올 일 자체가 별로 없었기도 했고, 부산 왔을 때도 가족 행사 등으로 왔던거라 가볍게 밀면 먹으러 나갈 사정이 아니기도 했습니다. 이번은 모처럼의 기회라, 부산역에서 숙소가 위치한 해운대로 가는 도중에 수영에 잠시 내려 3년 전에 좋은 인상을 받았던 가게에 다시 들렀습니다.

가게는 예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깔끔한 내부도 그대로구요. 밀면 가격은 그 사이에 1천원 올랐습니다. 가격이 안 올랐다면 좋았겠지만 모든 물가가 다 오르는 요즘, 밀면 가격만 그대로이기를 바랄 수는 없겠지요. 물밀면 대짜 하나, 그리고 손만두 하나를 주문했습니다.

음식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이 온육수를 떠다 맛을 봤습니다. 아주 진한 사골맛입니다. 여러 번 떠다 마시기에는 간이 좀 세지만 그만큼 구수한 감칠맛이 좋았습니다. 밀면 먹는 동안 옆에 가만 놔두니 하얀 기름도 살짝 굳어 뜹니다. 고기를 오래 삶은 국물이 맞는 모양입니다.

밀면의 겉모습은 3년 전에 먹은 것과 눈에 띄는 차이가 없었습니다. 사진으로 봐도 색감 차이 정도 밖에는 모르겠습니다. 사진으로 보면 양이 얼마 안 되어 보이지만, 반투명한 육수 안에 면이 숨어있어 양이 보기보다 많습니다. 성인 남성 기준 두 주먹은 될 것 같습니다.

소면과 중면 중간 정로 보이는 면의 두께가 여전히 독특합니다. 제가 다닌 밀면집 중 면을 이렇게 얇게 쓰는 집은 별로 없었거든요. 면을 잘 씻어나와 서로 뭉치지 않아서 깔끔하게 먹기 좋았습니다. 육수는 온육수로 맛본 사골육수에 몇 가지 단맛 나는 한약재가 들어간 느낌입니다. 여전히 달큰하긴 하지만, 밀면 치고 너무 달지 않아 좋았습니다.

손만두는 작지 않은 크기에 속이 꽉 차서 나옵니다. 잘게 다져넣은 야채 (그리고 아마도 두부) 덕분에 속이 아주 촉촉하고 식감이 부드럽습니다. 고기를 잔뜩 채워넣어 육즙이 터지는 중국식 만두보다는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한국식 만두로 보는 게 맞겠습니다. 가게에 들어설 때 보니 가게 한켠에서 직접 만두를 빚고 계셨습니다. 기성품이 아니라 가게에서 직접 빚어 쪄낸 진짜 손만두라는 데서 더 만족을 느꼈습니다.

굳이 새로운 집을 찾기보다 예전에 갔었던 집을 재방문했고, 결과는 만족스러웠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 겨울 + 저녁 콤보라 그런지 방문했을 때 손님이 많지 않았습니다. 경기가 빨리 회복되어 음식 잘 내는 집들은 더 장사가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2017년 5월 1일
물밀면 大 6,000원

고향이 경남이다보니 밀면은 나에게도 소울 푸드 중 하나다. 그 중, 밀면의 본진에 해당하는 부산에서 내가 찾아가는 밀면집은 딱 두 군데로 정해져 있었다. 근데 생각해보니 밀면집은 셀 수 없이 많은데, 굳이 딱 두 집만 찍어 다닐 필요가 없지 않나 싶었다. 그래서 이번 부산 방문에서는 미리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지나가다 깔끔해보이는 밀면집이면 아무데나 들러보기로 했다. 그렇게 찾아온 곳이 이집이다.

밖에서 보기보다 내부가 깔끔하고 손님도 많았다. 분위기는 관광지의 유명맛집이라기보다는 그냥 깔끔한 동네식당 정도. 내가 딱 원했던 바로 그 분위기였다.

물밀면은 5,000원이고 1,000원을 추가하면 大 크기를 주문할 수 있다. 오전에 자전거로 해운대 달맞이고개를 돌고 온 직후였던지라, 넉넉히 물밀면 大를 주문했다.

먼저 온육수가 나온다. 온육수는 누르스름한 우윳빛을 띄는 사골육수다. 여기에 간이 세게 되어 짭조름하고 감칠맛이 났다.

밀면

밀면과 함께 나온 냉육수는 사골육수인 온육수에 따로 식초, 설탕 등을 더한 것 같다. 온육수에는 없던 한약재향도 최근 먹었던 밀면 중에는 제법 강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뒷맛에는 고소함과 감칠맛이 어려있다.

면은 소면에 가까울 정도로 얇다. 하지만 적당하게 삶아 찬물에 잘 씻어낸 덕에 탄력과 쫄깃함이 좋았다. 바쁘다고 면을 대충 씻어내는 냉면집이나 밀면집을 아주 싫어하는데 이집에서 먹은 면은 아주 깔끔하고 즐거운 식감을 느낄 수 있었다.

고명은 계란, 수육, 오이채, 무절임이 올라간다. 대부분의 밀면에 올라가는 고명 구성으로, 수육은 수분감은 적었으나 담백하고 씹는 맛이 있었다.

경주에서 묵을 때 같이 방을 쓴 투숙객이 부산 출신이었다. 부산에 밀면 맛있는 집이 어디가 있냐고 물었더니 어딜 가나 대충 다 맛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번은 내가 운이 좋았던 건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지나가다 아무데나 들러서 먹은 밀면인데도 기대 이상의 밀면을 즐길 수 있었다. 서울에서는 꽝 밟을 확률이 너무 높아 어림도 없는 일이다. 역시 밀면은 부산에서 먹는 게 제대로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됐다.

GaN 충전기: 쉽게 풀어쓴 원리와 배경

들어가며

언제부턴가 ‘GaN (갠)’이라는 단어가 흔히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충전기 업계에서 GaN은 요즘 가장 뜨거운 마케팅 포인트가 됐습니다. 제품 판매글은 물론 블로그나 유튜브의 리뷰어들도 GaN 충전기가 뭐고 왜 좋은지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곤 합니다.

헌데 그런 설명 중 상당수는 내용이 부족하거나, 아예 사실과 다른 내용이 들어가 있기도 합니다. 자기가 말하는 내용이 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한 채 억지로 말을 만들다보니 벌어지는 일이지요.

그렇다보니 ‘일상덕질’의 일환으로서, 제가 아는 범위 안에서 GaN에 대해 최대한 쉽게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특히 GaN이 무엇인지, GaN이 들어간 충전기는 뭐가 좋은지, 왜 좋은지, 왜 이제서야 나온건지, 실제 GaN 충전기 내부는 어떤지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주의:
나름대로 최대한 쉽게 풀어쓰려고 했습니다만, 비전공자 입장에서는 여전히 어렵고 현업자 입장에서는 엄밀하게는 틀린 설명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림이나 사진 없이 글자만 가득한 장문의 글입니다. 미리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GaN이란 무엇인가

반도체

물질을 나누는 기준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전기가 얼마나 잘 통하는 지에 따라 물질을 나누면 전기가 잘 통하는 도체, 전기가 안 통하는 부도체, 그리고 조건에 따라 전기가 잘 통하기도 하고 안 통하기도 하는 반도체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반도체에 속하는 물질 중, 산업용으로 가장 흔히 사용되는 물질은 규소(Si, 실리콘)입니다. 모래처럼 흔한 광물(규산염)에서 추출할 수 있어 구하기 쉽고, 상대적으로 만들기 어렵지 않으면서, 전자회로에 써먹기에도 특성이 괜찮기 때문입니다.

Si vs. GaN

이 글의 주제인 GaN도 반도체 물질입니다. Si는 규소만으로 만드는 데 반해, GaN은 갈륨(Ga, Gallium)과 질소(N, Nitrogen)의 화합물이라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조건에 따라 전기를 통하기도 안 통하기도 한다는 점은 똑같습니다.

(엄밀하게는 말하면 Si 반도체가 100% 규소만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정제를 잘 해도 극소량의 불순물이 남기 마련이고, 공정 중에 불순물을 일부러 집어넣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불순물을 얼마나 넣느냐에 따라 반도체의 특성이 크게 달라지므로, 불순물을 넣는 과정(Doping)은 핵심 반도체 공정 중 하나입니다. GaN 반도체 역시 불순물을 섞어 만듭니다.)

GaN은 Si보다 전자회로에 필요한 특성들이 더 우수합니다. 전기가 통할 때는 전류가 더 많이 흐르고, 전기가 안 통할 때는 더 높은 전압을 버텨냅니다. 즉, 같은 사양의 반도체 부품을 GaN으로 만들면 Si으로 만들 때보다 크기가 작아집니다. 이 작아진다는 점이 GaN 반도체가 갖는 장점의 핵심입니다.

GaN, 전자회로, 충전기

GaN 반도체를 전자회로에 쓰는 이유

전자회로에 있어 반도체 부품의 크기가 작아지면 두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1) 부품의 저항이 낮아 열이 덜 나고, 2) 회로의 동작 속도가 빨라집니다. 이 두 가지 장점 모두 반도체 부품 뿐만 아니라 전자회로의 전체 크기가 작아지는데 기여합니다.

저항은 흐르는 전기에 저항하는 성질입니다. 저항이 클수록 흘려준 전기의 많은 부분을 출력으로 전달하지 않고 열로 소비해버립니다. 일부러 열을 내야 하는 전열기구가 아니라면 저항은 작을수록 좋습니다.

반도체 부품의 저항은 흔히 단위면적당 저항값으로 나타내는데 반도체 부품의 소재와 구조에 따라 달라집니다. GaN 소재는 Si 소재보다 단위면적당 저항이 낮을 뿐만 아니라, 크기가 작아지는 만큼 면적도 작아서 부품 전체 저항이 크게 줄어듭니다. 업계 자료를 보면 Si 반도체의 1/10도 안 될 정도로 차이가 많이 납니다.

저항이 줄어들면 그만큼 부품에서 열이 덜 납니다. 다시 말해, Si 반도체 부품을 쓸 때는 온도를 낮추기 위해 방열판이 필요했던 전자회로에 GaN 반도체 부품을 쓰면 방열판의 크기를 줄이거나 아예 빼버릴 수 있습니다. 그만큼 제품이 작아지고 가벼워집니다.

충전기를 포함한 전자회로의 핵심은 스위치를 켜고 끄는 기능입니다. 벽에 달린 스위치를 전등을 켜고 끄듯이, 조건에 따라 전기를 잘 통하기도 안 통하기도 하는 반도체 부품을 스위치로 사용하면 전기의 흐름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이때 부품의 크기가 작을수록 스위치를 켜고 끄는 데 힘이 덜 듭니다. 즉, 같은 힘으로 스위치를 더 빠르게 켜고 끌 수 있으므로 동작 속도가 빨라집니다.

동작 속도가 빨라지면 필요한 주변 부품의 크기도 덩달아 줄어듭니다. 웅덩이에서 물을 퍼낼 때 느리지만 한 번에 많이 퍼내는 것과 조금씩 빨리 퍼내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조금씩 빠르게 퍼낼 때는 굳이 큰 바가지를 쓸 필요가 없으니까요. 전자회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제품이 작아지고 가벼워집니다.

(‘큰 바가지로 빠르게 퍼낼 수도 있지 않냐’고 하실 수도 있지만, 사람의 체력에 한계가 있는 것처럼 전자회로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물을 한 번에 더 많이 또 더 빠르게 퍼내려면 사람을 더 부르든 양수기나 중장비를 동원해야 하는 것처럼 전자회로에도 더 크고 비싼 부품을 써야 합니다. 바로 아래에 나오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GaN 반도체를 그 동안 쓰지 못 했던 이유

GaN 반도체 부품이 갖는 장점이 이렇게 많음에도 실제로 일반 소비자용 제품이 출시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GaN을 이용한 최초의 양산 충전기는 제가 알기로는 2018년에 발매된 Anker PowerPort Atom PD 1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20년 2월 시점에서 보면 아직 2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GaN은 갑자기 튀어나온 기술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Si 반도체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고, GaN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럼에도 실제 양산 적용이 늦어진 결정적인 이유는 가격 때문입니다.

GaN 반도체는 Si 반도체보다 만들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보니 제조 비용부터가 비싼데 수율마저 나쁩니다. 게다가 이미 일반화된 Si 반도체에 비해 세계적으로 제조, 유통되는 물량이 훨씬 적습니다. 당연히 GaN 반도체 부품 가격이 비쌀 수 밖에 없습니다.

전자회로에 적용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전자회로의 핵심은 스위치를 켜고 끄는 기능입니다. Si 반도체 스위치는 버튼을 누르면 켜지고, 버튼에서 손을 떼면 꺼집니다. 간단하지요. 그런데, GaN 반도체 스위치는 버튼을 누르면 켜지는 건 똑같은데 버튼에서 손을 떼도 완전히 꺼지지 않습니다. 완전히 끄려면 버튼을 잡아당겨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전자업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스위치 제어기는 대부분 버튼을 누르고 떼는 기능만 갖고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그렇게만 해도 되는 Si 반도체 스위치에 개발 방향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GaN 반도체 스위치를 쓰려면 버튼을 잡아당기는 기능이 추가된 전용 제어기가 필요합니다. 당연히 제어기 가격도 올라갑니다.

GaN 반도체를 사용하면 높아진 동작 속도 덕분에 방열판과 주변 부품 수를 줄여 일부 원가를 절감할 수 있지만, GaN 반도체 스위치와 전용 제어기 가격 자체가 워낙 비싸다보니 전체적으로는 원가가 몇 배씩 올라갑니다. 그렇다보니 가격 경쟁과 원가 압박에 시달리는 업계에서는 GaN 반도체를 선뜻 쓸 수가 없었습니다.

GaN 반도체를 이제는 쓰는 이유

모든 기술은 성숙함에 따라 가격도 저렴해지기 마련입니다. GaN도 예외가 아닙니다. 학계와 업계의 많은 노력 끝에 GaN 반도체의 가격이 점점 떨어졌고, 필요한 제어기도 다양한 종류가 구비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게 불과 몇 년 전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Si 반도체보다 GaN 반도체는 몇 배나 비쌉니다.

그럼에도 GaN을 채용한 소자가 나올 수 있었던 건, 시장에 수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휴대하는 스마트 기기의 수가 많아졌고, 스마트 기기에 내장된 배터리 용량도 커졌습니다. 여기에 여러 충전 단자와 규격이 모두 USB 단자 기반으로 통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제 괜찮은 충전기 하나만 있으면 블루투스 이어폰부터 랩탑 컴퓨터까지 모두 빠르고 편하게 충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습니다. 좀 더 높은 금액을 지불하더라도 작고 가볍고 좋은 충전기를 원하는 소비자들이 생겨난 것이지요.

GaN을 사용한 충전기는 기존 Si 반도체 기반의 충전기에 비해 말도 안 되게 작아집니다. 가격은 조금 비싸지만, 괜찮습니다. 더 작고 가벼운 충전기를 위해 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는 소비자가 있으니까요. 그렇게 GaN 충전기는 시장에 진입했고, 폭발적인 인기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GaN 충전기의 생산, 판매 물량이 늘어갈수록 가격과 품질도 안정화될 것이므로 이런 경향은 앞으로도 계속되리라 봅니다.

GaN 충전기의 실제 예제

충전기에 GaN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실제 시장에 나온 충전기 중 하나를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몇 달 전부터 IT 커뮤니티에서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Baseus 65W 2C1A 제품을 골랐습니다. 미국 플러그로 나온 제품이지만 입력 전압 범위가 100-240V이므로 220V를 사용하는 한국에서는 어댑터(돼지코)를 사용하면 쓸 수 있습니다. 2C1A는 출력으로 USB-C 포트 2개, USB-A 포트 1개를 제공한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직접 뜯어볼 형편은 되지 않아서 ChargerLAB의 Teardown을 참고했습니다. 사진과 자세한 내용이 궁금한 분들은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ChargerLAB에서 분석한 내용 중, 특이한 점에 대해 간단히 의견만 달아보려고 합니다.

플라스틱 시트, 금속 조각, 테이프, 실리콘 등이 덕지덕지 발라진 내부가 조잡하다고 느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충전기 업계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좁은 공간에 부품을 최대한 구겨넣으면서도, 500V가 넘는 높은 전압과 전자기파로부터 사용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애플의 맥북 기판은 아름다운 설계를 자랑하지만, 애플 87W 충전기는 실리콘과 테이프 떡칠을 피해가지 못 한 것 역시 같은 이유입니다.

충전기의 전자회로는 건물 콘센트로부터 입력된 교류 전기를 스마트 기기의 충전 규격에 맞는 직류 전기로 변환합니다. 스마트폰 초창기의 5~10W USB 충전기는 출력전압이 5V로 고정되어 있어 변환을 단 한 번만 해주어도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 대세인 USB-PD 규격은 충전기의 출력 전압을 5~20V 사이에서 가변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입력된 교류 전기를 직류 전기로 바꾼 다음, 스마트 기기에서 요청하는 전압에 맞추어 다시 한 번 변환해주어야 합니다. 고용량 충전기는 입력 측에 역률 보정(Power Factor Correction, PFC)을 위한 변환 과정이 추가되기도 합니다.

(역률은 쉽게 말하면 전기요금 대비 실제 사용한 전기의 비율입니다. 보정회로가 있으면 대체로 90% 이상이지만, 없으면 50~70%까지 떨어집니다. 역률이 높으면 같은 전력을 쓰더라도 전기요금을 덜 냅니다. 전력망 단위로 보면 발전소에서도 전력을 덜 생산해도 되므로, 국가에서 전자제품이나 전동기기의 최소 역률을 규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각 변환 과정마다 최소 1개 이상의 반도체 스위치가 필요합니다. ‘GaN’이라며 광고하는 제품들은 바로 여기에 기존 Si 반도체 스위치 대신 GaN 반도체 스위치를 사용함으로써 전체 제품의 크기를 줄입니다.

Baseus 65W는 미국 Navitas의 NV6115 스위치를 사용했습니다. GaN 반도체 스위치에 GaN 스위치를 켜고 끄기 위한 제어기까지 합쳐놓은 부품입니다. 기존 Si 반도체 스위치가 있던 자리에 그대로 바꿔넣으면 되므로 설계가 편하다는 장점이 있어, 요즘 나오는 GaN 충전기 중 많은 수가 이 회사 부품을 쓰고 있습니다.

다만, ‘GaN’이라고 광고하는 제품이라고 해서 모든 스위치를 GaN 반도체로 바꾼 게 아니라는 점을 주의해야 합니다. Baseus 65W에는 적어도 7개 이상의 전력 변환용 반도체 스위치가 있는데, 그 중 GaN은 단 1개 뿐입니다. 나머지는 일반적인 Si 반도체 스위치들입니다. 어쨌든 GaN 반도체 스위치를 1개라도 쓰긴 했으니 ‘GaN’이라고 광고해도 거짓말은 아닙니다. 가격 차이가 워낙 크다보니 다른 GaN 충전기도 대부분 다르지 않으리라 봅니다.

Baseus 65W의 내부를 보니 성능, 품질, 가격 사이에서 상당한 타협이 이루어진 결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비용을 좀 더 투입했다면 회로가 더 작아질 수 있는 여지가 많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사용된 부품의 제조사도 상대적으로 신뢰가 덜 가는 곳들입니다. 미국, 유럽, 일본, 대만의 유명 제조사 부품만 사용한 애플 제품과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타협이 있었기에 30달러 전후의 저렴한 가격에 나올 수 있었겠지요. 판단은 소비자의 몫입니다.

마치며

이미 소비자들은 GaN 충전기가 좋다는 사실을 알아챈지 오래입니다. GaN 충전기는 앞으로 더 잘 팔릴 겁니다. 판매량이 늘면 더 많은 회사에서 더 많은 제품을 내놓을테고, 그만큼 더 좋은 제품을 더 저렴한 가격에 만나볼 수 있는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천하의 대세는 이미 정해졌습니다. 뒷일은 GaN이 알아서 하겠지요.”

사족: 충전기 구입시 주의할 점

GaN 충전기 시장이 급격히 커지는만큼 구입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2020년 2월 시점에서, 아직 한국 플러그를 지원하는 제품은 몇 개 안 됩니다. 특히 한국 플러그보다 얇은 EU 플러그를 한국 콘센트에 꽂으면 고장, 감전, 화재의 위험이 있습니다. 차라리 미국 플러그 제품을 사서 어댑터(‘돼지코’)를 쓰는 편이 낫고, 한국 플러그나 8자 전원 케이블 사용하는 제품을 구입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충전기는 위험한 교류 전기를 다루는 제품입니다. 혹시 모를 전기 사고를 막기 위해 부품과 부품 사이의 공간을 넓히거나 절연재를 대야 하고, 각종 보호회로와 전자파를 막기 위한 필터를 이중 삼중으로 넣어야 합니다. 그렇다보니 제대로 만든 충전기는 무작정 작고 가벼울 수가 없습니다. 이는 GaN을 써도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대기업의 검증된 제품 위주로 선택하시고, 경쟁 제품 대비 너무 작고 가벼운 제품은 조심해야 합니다.

전문가라면 제품을 뜯어보고 계측기로 파형을 측정해보면 제품의 완성도를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인은 이 제품이 제대로 된 제품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럴 때 최소한의 선택 기준은 ‘KC 인증’을 받은 제품을 구입하는 것입니다. KC 인증은 공인 시험기관에서 정해진 안전기준을 충족함을 확인했다는 뜻입니다. 100% 안전을 보장하지는 못 하더라도, 최소한의 시험도 거치지 않은 제품들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USB-IF 인증까지 받은 제품이면 더 좋습니다.

Reference

The Frenchie Co. Speed Wallet Mini 지갑 사용기

기본 정보

장점

  • 놀랍도록 작은 크기에 기가 막힌 카드/지페 수납
  • 얇지만 질 좋은 가죽 재질

단점

  • 스키니진 앞주머니에는 넣기 힘든 두께
  • 내용물이 너무 적으면 카드가 빠질 수 있음

사용기

구입

항상 작고 가벼우며 수납 효율 좋은 지갑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미니멀리즘을 표방한다는 지갑은 이미 많이 나와있었지만, 수납 좀 할 만 하면 크기가 너무 커지기 일쑤고, 작게 잘 나왔다 싶으면 십중팔구 지폐를 꾸깃꾸깃 접어넣어야 했다.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인디고고에서 우연히 괜찮아보이는 지갑을 찾았다. 콜롬비아에서 만든 세 번 접는 방식(Tri-fold)의 지갑이다. 재질이 이탈리아 풀그레인 가죽임을 감안해도 가격이 저렴하지는 않았지만, 구조와 크기가 아주 마음에 꼭 들었다.

일반 버전(Speed Wallet)과 미니 버전(Speed Wallet ‘Mini’)가 있는데, 일반 버전은 미니 버전보다 크기가 좀 더 큰 대신 지갑 안에 카드, 명함, 동전 등을 넣을 수 있는 수납 공간이 하나 더 있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작고 가벼운 지갑을 원했기에 미니 버전을 골랐다.

전세계 어디로든 무료배송 조건이었기에 배송대행지 대신 한국으로 직배송 받았다. 무료배송이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무려 DHL 특송이었다.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출발해 미국을 거쳐 서울까지 닷새 만에 받아볼 수 있었다.

사용 전

크기가 정말 인상적일만큼 작다. 지갑의 높이는 신용카드 한 장 길이와 정확히 딱 맞아 떨어질 정도다. 너비도 신용카드 너비에 가죽이 접힌 부분이 덧붙은 정도다.

그리 얇지는 않아서, 스키니진 주머니에 넣고 쓰기에는 불편한 지갑이다. 대신 한손에 쏙 들어오는 느낌이 기분 좋은데다 가방 오거나이저 어디에도 쉽게 수납할 수 있을만큼 작은 크기가 장점이다.

전체 뼈대는 얇은 가죽 두 장을 맞대어 바느질했다. 가죽이 워낙 얇다보니 무게도 가벼운 편이다. (56 g) 무게가 나갈만한 부분은 RFID 스캔을 막아주기 위한 얇은 금속판재 한 장과 지갑을 닫기 위한 자석 뿐이다.

가죽을 만져보면 부들부들 좋은 느낌이 난다. 합성섬유로 만들었다면 더 가벼웠겠지만 잘 손질된 가죽이 손에 닿는 느낌만큼은 합성섬유가 따라올 수 없다. 일부 부자재를 제외하고는 충살하 가죽으로만 만들어낸 지갑이다.

지갑 윗쪽에서는 두 개의 가죽 손잡이가 눈에 띈다. 손잡이는 카드를 6장까지 넣을 수 있는 두 개의 카드 수납 공간에 각각 연결되어 있다. 가죽 손잡이를 당기면 손잡이와 연결된 스트랩이 당겨지며 수납 공간에 들어있던 카드가 딸려 올라온다. 어느새 흔해진 기능인데 써보면 확실히 편하다. 스트랩은 나일론 재질이라 질기면서도 카드에 상처를 덜 낸다.

두 카드 수납 공간 중 검은색 가죽 손잡이가 달린 부분은 RFID 차단 필름이 붙어 있는 쪽이다. RFID 차단 뿐만 아니라 자석의 자기장으로부터 신용카드의 마그네틱 밴드 부분이 망가지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역할도 할 수 있겠다.

지갑의 플랩에는 자석이 들어있다. 플랩을 닫으면 ‘탁’ 소리가 나며 알아서 지갑이 닫힌다. 다시 열려면 적당히 힘을 줘서 자석을 떼어내야 한다. 아예 잠금장치가 없거나 벨크로, 똑딱 단추, 고무줄 같은 걸 쓰는 것에 비하면 훨씬 깔끔하고 조용하며 편하다.

플랩을 열면 지폐 수납 공간이 나타난다. 이 지갑은 길이 약 180 mm, 너비 80 mm까지의 지폐를 보이지 않게 수납할 수 있다. 지폐 대여섯장까지는 들어있는 줄도 모르게 수납할 수 있을 정도고, 지폐나 카드가 더 많아져도 자석 덕분에 지갑을 문제 없이 닫을 수 있다.

사용 중

가죽은 정말 사랑스러운 소재다. 주인과 함께 같이 나이들어가는 느낌이 좋다. 찍히고 상처나도 잘 관리해주면 어느새 밉지 않은 흔적만 남는다. 단, 품질 좋은 가죽일 경우에만 해당되는 얘기다.

다행히 이 지갑을 만드는 데 쓰인 가죽은 꽤 질이 좋았던 모양이다. 어쩌다 한 번씩 가죽용 영양크림을 발라주는 정도의 관리만으로도 코듀라 나일론 재질의 가방과 매일 마찰되는 가혹한 환경을 문제 없이 견뎌줬다.

아무래도 천연가죽이다보니 쓰면서 가죽이 조금씩 늘어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지갑이 가득 차 있을 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갑자기 수납량, 특히 카드 장수를 줄였을 때는 조심해야 한다. 가죽이 늘어난 상태에서 카드 장수를 줄이면 그만큼 빈 공간이 생기는데, 지갑을 아무리 꽉 여미더라도 카드가 흘러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항에서 PP카드를 흘리는 바람에 라운지 출입을 못 하기도 했었다.

이후 지갑은 가능한 가방 안에 세워서 보관하고, 손에 들 때는 카드가 흐르지 않도록 옆면에 손가락을 하나 걸쳐주는 습관을 들였더니 더 이상 카드를 분실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어쨌든 당하기 전에 조심해야 할 일이다.

RFID 스캔 방지 기능은 실사용에는 별 영향이 없었다. 주사용 신용카드를 RFID 스캔 방지가 된다는 수납 공간에 넣은 채 사용했는데, 서울 뿐만 아니라 경기도, 부산, 경상남도 등에서 주사용 카드의 후불교통카드 기능을 문제 없이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폐 정리는 연습이 필요하다. 원하는 지폐만 찾아 꺼내는 건 어렵지 않은데, 지폐를 원하는 곳에 빠르고 깔끔하게 끼워넣는 게 어렵다. 제조사의 홍보 영상을 보고 연습을 좀 해야 한다. 한 번 손에 익으면 빠르고 편하게 정리할 수 있다.

지갑이 워낙 작다보니 외화를 사용할 때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다. 위에 쓴 것처럼 이 지갑에 깔끔하게 수납할 수 있는 지폐의 크기는 길이 180 mm, 너비 80 mm까지다. 대부분의 외화가 잘 수납되지만, 일부 유독 너비가 넓은 고액권은 지갑 위로 조금씩 삐져나온다.

문제가 되는 지폐들은 아시아에서는 마카오 1000파타카(81.5 mm), 홍콩 1000달러(82 mm), 유럽에서는 100/200/500유로(82 mm), 영국 50파운드(85 mm) 정도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한국 원, 미국 달러, 캐나다 달러, 중국 위안, 일본 엔, 대만 달러, 태국 바트 등은 모두 깔끔하게 수납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권종들도 모두 각국의 최고액권들이라 여행 중 휴대 빈도가 적어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사용 후

얼마 전, 지갑을 바꿀 생각에 한참 국내외 쇼핑몰을 열심히 뒤진 적이 있었다. 지갑을 바꾸려고 했던 이유는 사용기간이 길어지며 가죽이 늘어진 덕에 카드 수납 공간이 헐거워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지갑만큼 작고 가볍고 고급스러우면서도 수납력 좋은 지갑을 찾을 수 없었다. 그만큼 좋은 지갑이다.

대신 구입한 것이 같은 회사의 같은 모델 중 나일론(Ballistic Nylon) 재질의 제품이다. 기존 가죽 제품이 가죽 두 장을 붙여 만들었다면, 나일론 제품은 안쪽은 가죽, 바깥쪽은 나일론 원단으로 되어 있다는 것만 다르다. 가격도 가죽 제품보다 10달러 저렴하다. (가죽 $89, 나일론 $79)

늘리면 그대로 늘어나는 가죽 대신, 탄성이 거의 없는 나일론 원단으로 뼈대가 잡힌 제품이다. 그만큼 오래 써도 카드 수납 공간이 늘어나지 않을 것을 기대하며 구입했다. 잘만 된다면 앞으로 아주 오래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지갑이 될 것 같다.

기내용 가방만으로 미니멀하게 여행 준비하기 (짐싸기 팁, 패킹리스트)

들어가며

이번 글의 주제는 ‘기내용 가방 하나만으로 해외여행하기’다. 말 그대로, 기내용 가방 하나만으로 짧게는 하루이틀에서 길게는 몇 달까지의 여행을 소화하는 요령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사실 해외에서는 이미 오랜기간 활발한 논의가 있어온 주제다. 무료 수하물 허용량 기준이 후한 편인 국내 항공사들과는 달리, 북미나 유럽 역내를 오가는 항공사들은 위탁수하물에 비용을 부과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사람 심리라는게 추가 요금 내기 싫은 게 당연하다보니 이에 대한 연구도 많을 수 밖에 없다.

내 경우, 처음에는 해외 자료들을 참고해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나만의 경험도 녹아든 전략과 패킹리스트가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났다. 덕분에 여행을 준비할 때마다 짐을 금방 뚝딱 쌀 수 있게 됐고, 여행 가방 하나만 있으면 언제 어디로 얼마나 여행을 갔다오든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 그간 다닌 여행의 경험이 쌓인 덕분이다.

여행의 효율은 약간의 전략만으로도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우리의 목적은 그렇게 높아진 효율을 이용해서 더 즐거운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다.

가장 먼저, 이 방법이 어떻게 여행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장점과 단점

장점 1: 시간 절약

여행에 쓸 수 있는 시간은 출국편과 귀국편 사이로 제한된다. 기내용 가방만으로 하는 여행은 이 제한된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

먼저, 공항 체크인 창구에 줄 설 필요가 없다. 위탁할 수하물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모바일로 간단히 체크인을 마치면 바로 보안구역으로 향할 수 있다.

도착 후에도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위탁수하물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이미 모든 짐을 비행기에서 가지고 내렸기 때문이다. 입국수속이든 세관신고든 바로 다음 절차를 밟으러 가면 된다.

일부 공항에서는 위탁수하물이 없는 여행자를 위한 입국심사 줄이 따로 있는 경우도 있다. 몇 년 전 미국 댈러스-포트워스 공항에서의 입국심사 때가 그랬는데, 사람이 훨씬 적어서 입국심사를 빠르게 마치고 나올 수 있었다.

장점 2: 돈 절약

한국 항공사들은 무료 위탁수하물 허용량을 여유 있게 제공하는 편이다. 하지만, 외항사나 저가항공사들은 그렇지 않다. 특히 대부분의 특가 항공편은 수하물 위탁이 무조건 유료다. 이런 항공편에 수하물을 위탁하려면 최소 몇 만원 정도의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다.

많은 저가항공사 또는 특가 항공편에는 무료 위탁 수하물이 제공되지 않는다. (출처: 제주항공, 2019년 12월 29일 확인)

반면, 기내용 가방 1개를 갖고 타는 건 저가항공사나 특가 티켓에서도 항상 무료다. 크기와 무게에 제한이 있지만 맞추기 크게 어렵지 않다. 당연히 돈을 내고 수하물을 위탁해야 할 이유가 없다.

장점 3: 걱정 절약

위탁된 수하물은 부주의하게 또 거칠게 다뤄진다. 수하물이 파손, 분실, 오배송되는 일이 흔할 수 밖에 없다. 금전적 보상이야 받을 수 있겠지만, 일정의 차질과 상한 기분은 보상 받을 길이 없다.

수하물을 위탁하지 않으면 이런 걱정에서 해방된다. 가방 딱 하나만 몸에서 떼어두지 않는 걸로 충분하다. 내가 어디로 가든 내 짐 역시 언제나 나와 함께 있을테니 말이다.

단점: 기내 수하물 제한

기내용 가방만으로 하는 여행의 단점은 모두 기내 수하물 반입 기준 때문에 생긴다. 하지만, 기준을 이해하고 전략을 잘 세워 준비하면 어렵지 않다. 처음에는 까다로울 수 있지만, 몇 번 하다보면 이내 자연스레 몸에 익기 때문이다.

Peak Design Travel Bag 30-45L

기내 수하물 반입 기준은 항공사마다 달라 미리 확인해야 한다. 가장 일반적인 기준은 크기 55 x 40 x 20 cm (약 45 L), 무게 7 kg 이다. 만약 무게를 5 kg 이하까지 줄일 수 있으면 어느 항공사든 적어도 수하물 무게 때문에 탑승을 거부당할 일이 없어진다. 때문에 내 패킹리스트도 가방 무게를 포함해서 여름 여행은 5 kg, 겨울 여행은 7 kg을 넘기지 않는 것을 목표로 했다.

무게 제한이 엄격한 항공사 중 하나인 중국남방항공. 5 kg에 불과하다. (출처: China Southern Airlines, 2019년 12월 29일 확인)

다만, 쇼핑만큼은 극복이 어렵다. 현지에서 산 물건은 국제소포로 부쳐버리고, 액체류 구매는 귀국편 기내면세점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소포와 여행객의 면세 한도가 달라 세금을 더 내야 할 수도 있고, 기내면세점은 물건 구색과 가격에서 장점이 별로 없다. 물론 나처럼 ‘기념품=예쁜 쓰레기’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 없다.

짐싸기 요령 10가지

짐싸기를 통해 달성해야 할 목적은 분명하다. 여행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만큼의 짐을 챙기면서도, 부피와 무게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기내용 가방 하나에 넉넉하게 수납할 수 있어야 하고, 작고 가벼울수록 좋다.

이 목적을 좀 더 쉽게 달성하려면 몇 가지 전략이 필요하다.

1. 백팩 vs. 캐리어

한국에서 ‘기내용 (가방)’은 20인치 캐리어와 동의어다. 기내용 가방만으로 하는 여행은 캐리어로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캐리어 대신 백팩(배낭)을 이용할 것을 강력히 권한다. 백팩이 더 나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캐리어는 민폐다. 콘크리트부터 대리석까지 바닥 재질을 가리지 않고 기관총 같은 소음을 쏟아낸다. 대중교통이나 길거리에서는 가만 있질 못 하고 혼자 굴러다니고 넘어진다. 만원 전철에서 몇 사람이 설 수 있는 공간을 가방 주제에 혼자 독차지한다.

캐리어는 주인에게도 민폐다. 코블스톤, 눈길, 진창을 지나거나 계단을 오르내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짐을 들고 뛰어야 할 때도 아주 불편하다. 바퀴가 망가지기라도 하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장거리 버스나 기차를 탈 때는 짐칸에 넣어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일단 내 시야에서 벗어난 물건은 내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나쁘다.

캐리어는 부피와 무게도 손해다. 바퀴와 손잡이 때문에 5 L 정도의 부피는 짐싸는데 쓸 수 없다. 무게는 경량 캐리어도 2 kg은 훌쩍 넘어간다. 우리의 최종 중량 목표인 5 kg 중 2 kg 이상을 가방만으로 채워버리면 짐 쌀 수 있는 게 없다. 심각한 문제다.

대안은 단 하나, 백팩이다. 배낭은 캐리어보다 가볍고 조용하며 민첩하다. 공공장소에서 배낭을 끌어안으면 민폐도 캐리어보다 훨씬 덜 하다. 백팩을 직접 짊어져야 하는 부담은 가벼운 백팩을 고르고 가볍게 짐을 싸면 크게 줄일 수 있다. 이보다 더 나은 대안은 아직 찾지 못 했다.

백팩은 크기에 비해 최대한 가볍고 편하며 생활방수가 되는 제품을 고르면 된다. 수납은 많을수록 좋지만, 또 자잘한 기능이 많아질수록 무게가 무거워지므로 주의해야 한다. 대체로 등산용 백팩들의 기능성이 좋은데 호불호 갈리는 외관이 문제다. 요즘은 사무직 출퇴근 가방으로 쓸 수 있을만큼 무난한 디자인의 여행용 백팩도 많으니 취향에 맞는 걸로 모르면 된다.

2. 기내수하물에 대한 최소한의 상식

기내수하물은 위탁수하물보다 크기, 무게, 내용물 측면에서 더 엄격한 제한이 적용된다. 앞서 언급했듯 일반적인 크기와 무게 기준은 55 x 40 x 20 cm, 7 kg(또는 5 kg)이다. 여기에 액체류, 인화물질, 공구류, 배터리 등에 대한 반입규정이 따로 있다.

크기와 무게 기준은 맞추기 어렵지 않다. 크기에 맞는 가방을 고르고, 짐을 가볍게 싸면 되기 때문이다.

기내에 갖고 탈 수 있는 크기 한계인 55 x 40 x 20 cm는 부피로 환산하면 대략 45 L 정도 된다. 40~45 L 백팩은 짐을 많이 넣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가방이 크고 짐이 많으면 무게를 줄이기 어렵다.

혹시 가방 크기가 45 x 35 x 20 cm보다 더 작다면 높은 확률로 앞 좌석 아래 공간에 가방을 넣을 수 있다. 부피로는 30 L 정도다. 가방을 좌석 아래 공간에 넣으면 아무래도 남의 손을 탈 확률이 낮아지기 마련이다. 짐을 그만큼 줄일 수 있다면 30 L 짜리 백팩이 나쁠 게 없다.

하지만 나는 특히 겨울 여행에는 짐을 그만큼 줄이지 못 했기에 그보다는 더 큰 백팩이 필요했다. 여행용 백팩 중에는 지퍼를 이용해서 용량을 조절할 수 있는 제품도 있는데, 이런 제품은 가방을 한 바퀴 도는 지퍼가 추가된 덕에 생각보다 무겁다. 제외다.

이런 고민 끝에 지금 쓰는 제품은 35 L 짜리 백팩이다. 원래 1 kg을 약간 넘는 가방인데, 나는 여행 중에는 랩탑이나 허리 스트랩을 안 쓰므로 탈착식 랩탑 파우치와 허리 스트랩을 떼어냈더니 1 kg에서 몇 g 빠지는 무게로 측정됐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출처: TSA.gov)

그보다 내용물 제한을 맞추는 일이 더 번거롭다. 대표적인 것이 액체류 제한이다. 여기도 일종의 표준은 있다. 미국 교통안전국(TSA)의 3-1-1 liquids rule이다. 3-1-1은 각각 3.4 oz.(= 100 mL), 1 qt.(= 1 L), 1개의 의미로, 풀어쓰면 액체류는 100 mL 이하의 개별 용기에 담아 1 L 짜리 투명 지퍼백 1개에 들어가는 분량에 한해 기내 반입 가능하다는 뜻이다.

규정만 보면 100 mL 짜리 소분병 10개를 갖고 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미국 공항에 비치된 TSA 기준 지퍼백에 100 mL 짜리 소분병을 담아보면 많아야 너댓개 정도가 한계다. 마개가 차지하는 부피도 있고, 화장품 용기나 소분병은 원통형이다보니 직육면체보다 낭비되는 공간이 많기 때문이다.

액체류 파우치: 선크림과 리퀴드솝, 치약만 챙겼고, 로션은 현지 구매할 요량으로 챙기지 않았다.

어차피 액체류는 가볍게 짐을 쌀 때 요주의 대상이다. 액체류는 밀도가 높아 부피 대비 무겁기 때문이다. 100 mL 소분병 너댓개를 반입 가능하다고 해서 병들을 꽉꽉 채우면 400~500g은 금방이다. 무게는 곧 돈이다. 최대한 줄여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현지구매다. 전세계 어딜 가든 어지간하면 로션, 자외선차단제, 물티슈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다. 호텔에 묵는다면 샴푸, 컨디셔너, 로션 정도는 제공되니 굳이 안 챙겨도 된다. 꼭 특정 제품을 써야 한다면, 매일 쓰는 양을 미리 계량해두었다 필요한만큼만 소분하면 된다.

그 외 신경써야 할 물건은 공구류, 인화물질, 배터리다. 공구류나 인화물질은 당연히 기내에 갖고 타지 말아야 한다. 특히 날붙이와 라이터가 주로 문제가 된다. 모두 현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니 아예 갖고 타지 말자.

[샤오미 보조배터리 용량 표기 사진]

배터리는 반대로 수하물 위탁이 안 되어 기내에 갖고 타야 한다. 보조배터리는 겉면에 용량이 표기되어 있어야 문제가 없다. 특히 중국 공항에서는 보안검사 때 반드시 확인하는 항목이다. 잘 모르겠으면 샤오미 같은 중국업체 제품을 사용하는 편이 안전하다.

3. 기내수하물과 개인소지품

Peak Design Field Pouch + Peak Design Leash Strap

대부분의 항공사들이 기내수하물 가방 하나와는 별도로 개인소지품 하나를 기내 반입 허용한다. 서류가방이나 핸드백 같은 것들인데, 잘 활용하면 기내수하물의 크기와 무게 제한을 우회할 수 있다. 구체적인 기준은 항공사마다 차이가 있고, 허용하지 않는 곳도 있으므로 미리 확인해야 한다.

다만, 개인소지품이 기내수하물 가방 기준에서 제외될 수는 있어도 여행하는 동안 계속 갖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짐을 넘치게 싸면 여행을 즐길 체력을 갉아먹기 마련이다. 때문에 개인소지품 허용량은 없다고 생각하고 최대한 가볍게 짐을 싸되, 예상치 못 한 비상상황 때 활용할 수 있도록 미리 조사 정도만 해두는 편이 좋겠다.

4. 챙겨야 할 짐과 빼야 할 짐

본격적으로 짐을 줄여야 할 시간이다. 짐을 줄이려면 챙길 것과 뺄 것을 구분하기 위한 기준이 필요하다.

가장 기본적인 기준은 ‘있어야만 하는 것’은 챙기고, ‘있으면 좋은 것’은 빼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 둘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마다 여행의 형태가 다르므로 판단 기준 역시 다를 수 밖에 없다. 내 경우, 구분이 어려울 때는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 일정에 차질이 있는가? (여권, 신용카드, 현금, 예약 영수증)
  • 생존과 안전에 필수적인가? (최소한의 옷, 신발, 외투, 물, 내복약)

위에 해당하는 물건은 챙겨야 한다. 여권도 없이 발가벗은 채 대문 밖을 나설 수는 없다. 낯선 환경에서 최소한의 생존과 품위를 지킬 수 있는 물건 정도는 당연히 가지고 간다.

  •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가? (여벌 옷, 화장품, 위생용품, 비상의약품, 면도기, 수건)
  • 다른 물건으로 대신할 수 있는가? (카메라→스마트폰, 수영복→반바지)

반면, 위에 해당하는 물건은 과감히 뺀다. 굳이 챙겨가더라도 거의 쓰지 않은 채 그대로 다시 한국으로 들고 오기 일쑤다. 쓰임도 없이 자리와 무게만 차지한다면 당연히 빼야 한다.

사실 여행 중 필요한 물건은 대부분 현지의 시장, 약국, 슈퍼마켓 등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어차피 전부 사람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전세계 어딜 가든 옷, 신발, 수건, 면도기, 생리대, 감기약 같은 생필품은 모두 구할 수 있다. 굳이 한국에서부터 잔뜩 싸들고 갈 필요가 없다.

5. 다용도 아이템

짐의 양을 줄이려면 물건 하나가 여러 역할을 할 수 있는 것 위주로 챙기는 게 좋다. 예를 들면 왼쪽 물건들을 챙기는 대신 오른쪽 물건만을 챙겨가는 식이다. 이렇게 물건의 가짓수를 줄이는 것만으로도 많은 양의 짐을 손쉽게 줄일 수 있다.

  • 책 + 랩탑 + 수첩 + 바우처 → 태블릿
  • 스카프 + 비니 + 마스크 + 손수건 → 버프
  • 귀마개 + 이어폰 + 노이즈캔슬링 헤드폰 → 노이즈캔슬링 무선 이어폰
  • 샴푸 + 클렌징폼 + 바디워시 + 세탁세제 → 액체비누
  • 헤어 컨디셔너 + 섬유유연제 → 린스
  • 바람막이 재킷 + 비옷 + 우산 → 방수재킷
  • 내복 + 스웨터 + 룸웨어 + 목베개 + 무릎 담요 → 긴팔 티셔츠
  • 룸웨어 + 여름 외출복 + 수영복 → 반바지

반대로 항상 쓰는 것도 아닌데 한 가지 역할 밖에 못 하는 물건은 가능한 챙기지 않는 쪽이 좋다.

  • 여행용 목베개는 장거리 비행 중에는 편하겠지만 여행지에서는 어딜 가든 자리만 차지하는 짐짝이 된다. 대신 부드러운 옷을 돌돌 말아 쓰는 쪽이 훨씬 경제적이다.
  • 여행의 주목적이 사진인 게 아니라면 카메라는 그저 무겁고, 파손이나 도난 위험 높은 짐짝일 뿐이다. 여행의 추억을 꼭 사진으로 남겨야 할 필요는 없다. 글이나 그림도 좋고, 그냥 좋은 기억으로만 남겨도 충분하다. 꼭 사진이 필요하다면 대부분은 스마트폰 카메라가 대신할 수 있다.

6. 옷

옷은 여행짐 중 가장 큰 부피를 차지한다. 그렇다고 옷을 안 입을 수는 없으니 무작정 빼기도 어렵다. 즉, 옷을 챙기되 효율적으로 챙겨야 한다. 여기에는 옷의 수량, 재질, 종류까지 모든 면이 중요하다.

옷의 양을 줄이는 방법

옷의 양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세탁이다. 여행기간이 짧으면 굳이 옷을 빨아입지 않아도 매일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다. 하지만 여행기간이 길어지면 결국 언젠가는 옷을 빨아 입을 수 밖에 없다. 옷을 자주 빨수록 챙겨야 할 옷의 양도 줄어든다.

처음에는 여행 중 세탁에 대한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다. 샤워 중에 간단히 손빨래 할 수도 있고, 숙소에 비치된 세탁기를 쓸 수도 있다. 숙소의 세탁 서비스나 동네 세탁소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각자의 사정에 맞는 방법을 쓰면 된다.

손세탁을 위해 굳이 세탁세제를 챙길 필요도 없다. 나는 세수나 몸 씻을 때 쓰는 리퀴드솝을 손세탁에도 쓰는데, 약알칼리성 세제의 pH가 보통 10~11 정도인데 반해 몸에 쓰는 리퀴드솝은 pH 9.3이므로 오히려 중성(pH 8)에 더 가까워 옷이 덜 상한다. 여기에 약산성(pH 4~6)인 샴푸, 린스, 컨디셔너 등으로 헹궈주면 잔여 알칼리 성분이 중화되어 섬유유연제를 대신할 수 있다.

내가 챙기는 옷은 보통 속옷은 입고 있는 것 포함 세 벌, 겉옷은 한 벌씩이다. 겉옷 안에 항상 속옷을 입고, 사나흘에 한 번씩의 세탁을 전제로 한 양이다. 적어보일 수도 있지만 옷만으로도 지금까지 여행 중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같은 옷을 아무리 돌려 입는다 해도 여행 중에 어제 본 사람을 오늘 또 볼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겉보기에 더럽지 않고 냄새 나지 않으면 민폐 끼칠 것도 없다.

여벌옷의 양을 이렇게 줄일 수 있었던 건 애초에 옷이 잘 더러워지지 않아 자주 빨 필요가 없는데다 자기 전에 빨아놓으면 다음날 아침에 깨끗하게 말라 바로 다시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옷 재질을 잘 고른 덕분이다.

여행용 옷의 재질

여행 때 입을 옷은 재질이 중요하다. 구김과 오염에 강하면서 빨리 말라야 한다. 구김에 강한 옷은 다림질할 필요가 없어 큰 노력 없이도 멀끔해보인다. 옷이 오염에 강하면 굳이 자주 빨지 않아도 된다. 금방 마르는 옷은 땀을 흘렸거나 비를 맞았을 때는 물론, 전날 입고 세탁한 옷을 바로 다음날 아침에 입을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런 재질은 대표적으로 울, 리넨, 뱀부얀, 리오셀(텐셀) 같은 천연섬유나 폴리에스테르, 나일론 같은 합성섬유가 있다. 이들 사이에도 장단점이 있다. 울은 따뜻하지만 피부에 자극이 있을 수 있고, 리넨은 시원하지만 구김에 약하다. 합성섬유는 항균 처리가 안 되어 있으면 젖은 후 금새 냄새가 나기 쉽다.

78% 메리노울에 22% 나일론 혼방 티셔츠. 나일론 혼방 제품은 메리노울의 단점 중 하나인 내구성을 보완해준다.

이 중 내가 좋아하는 재질은 메리노울이다. 메리노울은 일반 울보다 섬유가 얇아 더 가볍고 부드럽고 구김이 잘 안 가면서 빨리 마른다. 별다른 화학처리 없이도 신기할만큼 냄새와 오염에 강하다. 이런 장점 때문에 평소에 입는 속옷, 양말, 셔츠는 모두 메리노울 제품이다. 여행짐 쌀 때도 평소 입는 옷을 그대로 챙기면 되니 편하다.

다만 메리노울은 비싸고 선택의 폭이 좁다. 다행히, 유니클로의 에어리즘/히트텍, 탑텐의 쿨에어/온에어 같은 가성비 좋은 합성섬유 제품들이 대안이 될 수 있다. 모두 가볍고 빨리 마르며 항균 처리된 제품도 있다. 시원한 여름용은 속옷으로 입고, 따뜻한 겨울용은 추운 계절에 속옷 위에 덧입으면 된다.

최악의 재질은 면이다. 자극 없이 부드럽고 상대적으로 저렴하지만, 잘 구겨지고 무겁고 약한데 한 번 젖으면 잘 안 마르고 쉰내까지 난다. 여행용으로 면티에 청바지는 좋지 않은 선택일 수 밖에 없다.

바지도 합성섬유 재질이 좋다. 잘 마르고 가벼우며 튼튼하기 때문이다. 드물게 발수 코팅이 되어 나오는 제품도 있는데 젖은 바지의 찝찝함 자체를 경험하지 않을 수 있으므로 여행용으로도 대단히 좋다.

런던에서 비가 많이 왔지만 생활방수 되는 가방, 신발, 재킷 덕에 젖지 않고 다닐 수 있었다.

신발 역시 재질이 중요하다. 가볍고 통기가 잘 되며 무엇보다 어느곳 하나 끼고 눌리는 곳 없이 편해야 한다. 특히 여행 중 비가 올 가능성이 있다면, 방수가 필요하다. 한 번 젖은 양말의 찝찝함과 냄새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방수가 안 되는 신발이더라도 합성섬유 신발에는 발수 스프레이를, 가죽 신발에는 왁스를 발라주면 쏟아지는 비에도 좀 더 오래 젖지 않고 버틸 수 있다.

레이어링

여행지의 날씨는 변덕스럽기 쉽다. 한국과 비슷한 기온이더라도 습도나 풍속에 따라 체감기온이 크게 달라지기도 한다. 여행 일정에 따라 며칠 만에 열사의 사막과 눈 덮인 고산지대를 오가게 될 수도 있다.

때문에 쉽게 입고 벗을 수 있는 옷을 여러 벌 챙기는 것이 좋다. 무게 대비 따뜻하면서 주머니나 후드에 압축해넣어 부피를 줄일 수 있으면 더 좋다. 최소한 보온 의류 한 벌, 비바람을 막아줄 방수 재킷 한 벌씩은 꼭 있어야 한다.

방수 재킷은 등산용 하드쉘이나 소프트쉘 재킷을 고르면 된다. 여행용으로는 소프트쉘이 얇고 가벼우면서도 필요한 기능은 모두 되므로 더 좋다. 고어텍스 재질도 좋지만, 요즘은 대체재가 많으므로 방수, 방풍, 통풍만 되면 아무래도 상관 없다. 여행지가 더운 곳이거나 트래킹할 계획이 있으면 겨드랑이 쪽에 통풍 지퍼가 있으면 편하다.

내가 한겨울 여행 때 입는 레이어는 이렇다. 모두 얇고 가벼운 옷들이지만, 모두 껴입으면 놀랍도록 따뜻하다.

  1. 반팔 티셔츠
  2. 긴팔 티셔츠
  3. 긴팔 셔츠
  4. 경량 패딩 재킷
  5. 경량 플리스 재킷
  6. 후드집업
  7. 방수 재킷

여기에 비니와 버프를 더하면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도 두렵지 않다. 그럼에도 두터운 대장급 패딩 한벌보다 부피가 작고, 상황이나 날씨에 따라 입고 벗을 수 있으니 다양한 상황에 훨씬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7. 패킹 큐브와 지퍼백의 활용

여행가방에는 다양한 물건이 담기기 마련이다. 그만큼 깔끔하게 정리하기 쉽지 않다. 특히 출발할 때는 어찌어찌 정리가 되어 있었더라도 며칠 지나지 않아 엉망이 되기 쉽다.

이럴 때 패킹 큐브가 편리하다. 짐을 잘 분류해서 패킹 큐브에 나누어 수납하면 가방 안이 깔끔해진다.

패킹 큐브 중에는 압축 지퍼가 달린 제품도 있는데, 특히 옷에 사용하면 부피를 꽤 줄일 수 있다. 깨끗한 옷과 더러운 옷을 분리 수납할 수 있는 제품도 있고, 아예 방수가 되기도 한다. 패킹 큐브의 기능이 많은만큼 무게도 늘어나니 적당한 선에서 타협해야 한다.

지퍼백도 여행 때 유용한 물건 중 하나다. 싸고 얇고 가벼운데 방수까지 된다. 훌륭한 발명품이다.

공항에서 보안검색 통과할 때 액체류를 담는데 쓰기도 하고, 전자제품과 실리카겔 봉지 하나를 지퍼백에 같이 담으면 열대우림에서도 걱정이 없다. 진공팩처럼 옷을 넣고 눌러 부피를 줄일 수도 있다. 지퍼백만 잘 써도 패킹 큐브가 전혀 필요 없을 수도 있다. 지퍼백의 용도를 제약하는 건 상상력의 한계 뿐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자.

8. 무게 측정

여행짐 무게를 효과적으로 줄이기 위해서는 무게를 직접 달아보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

이미 갖고 있는 여행용품은 무게를 직접 재보면 된다. 정밀 저울이 아니더라도 주방용 저울이나 체중계 정도로도 충분하다. 측정한 무게는 엑셀에 정리해두면 편하다.

아직 구입하지 않은 여행용품도 상품 상세정보에 표기된 무게를 참고해서 전체 짐 무게에 주는 영향을 가늠해볼 수 있다. 비슷한 기능성을 가진 물건 중 최대한 가벼운 것으로 사면 짐을 가볍게 싸는데 도움이 된다.

한 번 정리를 잘 해두면 무게 최적화를 위한 계획도 세워볼 수 있다. 무겁거나 수량이 많은 물건일수록 빼거나 가벼운 물건으로 바꿨을 때 효과가 크다. 무게를 줄이겠다고 무리해서 새 물건을 사지 말고, 바꿀 것들을 미리 체크해뒀다 정말 필요해졌을 때 구입하는 식으로 천천히 바꿔가면 된다.

9. 비상금과 비상서류

짐을 가볍게 싸더라도 챙길 건 챙겨야 한다. 특히 여행 중 여권과 지갑을 한번에 잃어버렸을 때를 대비해야 한다. 말 안 통하는 외국에서 이런 일이 생기면 정말 곤란해진다.

필요한 건 크게 두 가지다. 바로 비상금과 비상서류다.

비상금은 가장 가까운 한국 재외공관까지 가기 위한 비용이다. 일단 재외공관까지 굶지 않고 가는 게 중요하다. 일단 도착하기만 하면 신속해외송금지원제도를 이용해서 최대 3천 달러 상당의 현금을 송금 받을 수 있으므로 서류 발급 수수료, 발급기간 동안의 숙식비와 귀국비용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려면 적어도 2~3일치의 숙박비, 식비와 교통비가 필요하다. 현지 화폐가 가장 좋지만 전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미국 달러도 괜찮다. 풍찬노숙을 면하기 위해 하루에 필요한 돈은 대략 100달러 정도다. 서유럽에서는 빠듯할 수도 있고, 개도국에서는 하루 치로는 넘치는 돈이니 현지 물가에 따라 조정하면 된다. 약 300~500달러 정도를 소액권, 구권으로 갖고 있으면 든든하다.

비상서류는 재외공관에서 단수여권이나 여행증명서를 발급 받기 위한 서류들이다. 다른 서류는 재외공관에서 양식을 받아 작성하면 되고, 여기에 여권용 사진 2장과 기존 여권의 사본이 필요하다. 여권 사본은 신분증으로 대신할 수 있지만 영문 운전면허증을 쓰는 게 아닌 이상 여권 사본 쪽이 분실하더라도 리스크가 적다.

여권용 사진은 비자나 패스 발급 등에 필요하기도 하므로 넉넉히 챙겨두는 것도 좋다. 여권 사본은 여권을 분실한 상태에서 검문을 받거나 숙소에 체크인할 때 꼭 받아준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물론 비상금과 서류를 쓸 일이 아예 안 생기는 게 가장 좋다. 여권, 현금, 신용카드, 비상금, 비상서류는 모두 가방과 옷 여기저기, 숙소 안전금고나 프런트 등에 꼼꼼하게 분리해서 보관해야 한다. 지퍼백을 이용해서 젖거나 찢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10. 가방에는 빈 공간이 필요하다

가방 안의 여유 공간. Nomatic Travel Bag (40L)

가방의 빈 공간은 여러 목적으로 쓰일 수 있다. 입고 있던 외투나 신발을 벗어 넣으려면 공간이 필요하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인생템을 사오려고 해도 공간이 필요하다. 선물을 사려고 해도 역시 가방에 선물을 위한 공간이 남아있어야 한다. 어느 쪽이든 생각보다 많은 공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가방에 빈 공간을 넉넉하게 남기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빈 공간이 있으면 채우고 싶은 것이 사람의 당연한 심리기 때문이다. 일단 오버패킹하게 되면 꼭 필요하지 않으면서도 무게와 부피만 차지하는 물건이 섞여들어가 여행기간 내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게 된다.

세상 모든 것에는 채움만큼이나 비움 역시 중요하다. 여행 가방 역시 마찬가지다. 오버패킹을 경계하고, 항상 무언가를 더 챙기기보다 더 빼려고 노력하자.

나만의 패킹리스트

먼저 강조하고 싶은 건, ‘나만의 패킹리스트’를 만드는 일의 중요성이다. 위에 몇 가지 요령을 소개했고 밑에는 내가 쓰는 패킹리스트도 올려뒀지만 이 모두는 나에게 맞춰진 것일 뿐이므로 다른 사람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주로 하는 여행은 주로 도시에서 매일 5만 걸음 씩을 끈덕지게 걷고, 4~5성급 호텔에 묵으며, 한여름에도 긴팔 셔츠, 블랙진에 가죽구두 차림을 고집하는 여행이다. 그래서 내 패킹리스트는 빌딩 사이에서 칼바람 맞으며 걸어도 버틸 수 있게 얇은 옷을 많이 레이어드하고, 세탁하기 쉬운 환경이라 그만큼 속옷 양을 줄이며, 긴팔 셔츠에 긴 바지, 옥스포드화가 포함되어 있다.

자신의 여행이 이와 다르다면 얼마든지 바꾸어도 좋다. 여성이라면 여성용품을 추가하고, 호스텔을 이용한다면 여벌옷과 빨랫줄에 자물쇠를 추가하고, 캐주얼을 선호한다면 옷도 더 편한 걸로 바꾸면 된다. 하이킹이 예정되어 있다면 신발을 제대로 된 등산화로 바꾸는 식이다.

그렇게 몇 번 여행을 해보면 나와 잘 맞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자연히 알 수 있다. 그러면 다음 여행을 준비하면서 먼젓번의 여행을 교훈 삼아 패킹리스트를 고쳐나가면 된다. 그렇게 나만의 패킹리스트를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으로서 추구해야 할 최종 목표다.

아래는 내가 여름부터 겨울, 휴가에서 업무출장, 2박 3일에서 수 주 짜리 여행까지 공용으로 쓰는 패킹리스트다. 가방을 포함한 짐무게는 여름 내지는 간절기용으로는 4 kg 후반대, 겨울옷까지 다 챙겨도 6 kg 초반대다.

각 품목마다 내가 실제로 사용하는 물건들과 실측한 무게를 같이 표기했다. 이탤릭은 원래는 챙기지 않지만, 계절이나 여행의 목적 등에 따라 챙기는 물건들이다. 이들을 다 챙기더라도 기내수하물 무게가 7 kg이 넘지 않도록 구성했다.

무게를 더 줄일 수 있는 여지는 여전히 남아있다. 화장품류를 현지 구입하면 수백 그램 이상을 더 줄일 수 있는데, 좋아하는 물건만 찍어두고 쓰는 까다로운 성격 때문에 더 줄이지 못 했다. 태블릿도 스마트폰으로 대체하면 되는데 아직은 고집스레 챙기고 있다.


  • 백팩: Arcido Akra 35 L (990 g; 미사용 액세서리 제거)
    • 보조 가방/기내용 가방: Peak Design Everyday Sling 5 L (449 g; 짐이 적을 때)
      or 경량 백팩: Matador Freefly 16L Packable Backpack (137 g; 짐이 많을 때)
      • 여권 (5 g)
      • 지갑: The Frenchie Co. Speed Wallet Mini (66 g; 현금/신용카드 포함)
      • 비상금/비상서류 (48 g; 지퍼백 포함)
      • 손목시계: G-Shock GW-5000 (113 g; 스트랩 교체, 방수/태양광 충전/전파수신)
      • 스마트폰: Apple iPhone 6s (171 g; 케이스 포함; 카메라 겸용)
      • 태블릿: Apple iPad mini 5th gen. (377 g; 케이스 포함)
      • 전자펜: Appe Pencil 1st gen. (20 g)
      • 키보드: Logitech Keys-to-Go (185 g)
      • 거치대: Nite Ize QuikStand (10 g)
      • 이어폰: Sony WF-1000XM3 (92 g; 밀폐형 완전 무선 노이즈캔슬링 이어폰)
      • 보조배터리: Xiaomi Mi Power 2 (227 g, 10,000 mAh)
      • USB 케이블: 5 cm (10 g)
      • 물통: Vapur Element 1 L (42 g; 접이식 물통)
      • 목베개: Sea-to-Summit Aeros Premium Traveller Pillow (85 g; 압축백 포함)
      • 수면안대: 인트래블 3D 입체안대 (10 g)
    • 비행기 탈 때 착용
      • 속옷: Wool&Prince Boxer Brief 2.0 (74 g; S)
      • 양말: Darn Tough T4016 Tactical No Show Cushion (53 g; L; 발목양말)
        or Darn Tough T4066 Tactical Micro Crew Cushion (78 g; L; 겨울용 긴양말)
      • 반팔티: Wool&Prince Crew Neck (140 g; XS)
      • 긴팔셔츠: Wool&Prince Button-down (213 g; XS/Slim)
      • 후드집업: Icebreaker Shifter Long Sleeve Zip Hood (425 g; M)
        or 블레이저: Wool&Prince Travel Blazer (512 g; 36, Regular, 수선)
      • 긴바지: Outlier Slim Dungarees (391 g; 29″, 수선)
      • 구두: Lems Nine2Five Oxford Shoes (510 g; US Men 12)
        or 부츠: Lems Waterproof Boulder Boots (800 g; US Men 12)
      • 내복 상의: Icebreaker 260 Tech Long Sleeve Crew (252 g; S; 겨울용)
      • 내복 하의: Icebreaker 260 Tech Leggings (210 g; S; 겨울용)
    • 여벌옷 파우치: Peak Design Packing Cube Small (108 g)
      • 속옷 x2
      • 양말 x2
      • 반팔티 x2
      • 반바지: Icebreaker Cool-Lite Momentum Shorts (221 g; S)
      • 수건: LinenMe Waffle Linen Hand Towel (93 g; 70 x 50 cm)
      • 버프: Buff Midweight Merino Wool Neckwear (66 g)
      • 비니: Buff Midweight Merino Wool Hat (36 g)
    • 겉옷 파우치: Peak Design Packing Cube Small (108 g)
      • 방수 재킷: Patagonia Torrentshell Rain Jacket (343 g; Men S)
      • 경량 패딩: Patagonia Micro Puff Jacket (248 g; Men S; 가을-겨울용)
      • 플리스 재킷: Nike Dri-Fit Long Sleeve Zip Jacket (381 g; 겨울용)
      • 플리스 팬츠: Nike Dri-Fit Fleece Track Pants (279 g; 겨울용)
    • 신발 파우치: Peak Design Shoe Pouch (45 g)
      • 샌들: Xero Shoes Z-Trail (340 g; US Men 11)
    • 액체류 파우치: Go Travel Cabin Bottle Set Pouch (24 g)
      • 소분용기 x2: Humanger Gotoob+ Silicone Travel Bottle (65 g/ea)
        • 비누: Dr. Bronner’s Pure-castle Liquid Soap (30 g)
        • 로션: 얼굴/전신 겸용 (100 g)
      • 자외선차단제: Eucerin Oil Control Sun Gel Cream SPF50+ (30-80 g)
      • 치약 (10 g; 호텔 어메니티 활용 또는 현지 구매)
      • 면도기 (호텔 어메니티 활용 또는 현지 구매)
      • 처방약 (30 g; 천식 흡입기)
      • 칫솔: Curaprox CS 5460 (16 g; 보호캡 포함)
    • 충전기류: 백팩 자체 수납공간 활용
      • 충전기: Anker PowerPort 5 (152 g)
      • 전원 케이블: 미국형 30 cm (42 g)
      • USB 케이블 x3: 15 cm (10 g/ea)
      • 멀티어댑터: Travel Easy Worldwide Travel Adapter (36 g)
    • 기타: 백팩 자체 수납공간 활용
      • 선글라스: Oakley Sliver Stealth Asian Fit (31 g; 소프트파우치 포함)
      • 병따개 겸용 카라비너 (17 g)
      • 볼펜: Ti Click EDC Pen (27 g)
      • 지퍼백 x2 (10 g/ea)
      • 빨랫줄: Sea-to-Summit The Clothesline (36 g)
      • 다용도 방수 담요: Matador Pocket Blanket (97 g)

마치며

남미 신혼여행 중. Incase EO Travel Backpack (30L)

당연하게도 캐리어를 수하물 위탁하며 여행 다니던 시절에는 이게 정말 될까 싶었다. 그런데, 해보니 정말 된다. 기내용 배낭 하나만으로도 사흘 짜리 업무 출장부터 2주 짜리 신혼여행까지 모두 문제가 없었다. 경험이 쌓이니 이제는 백팩 하나만 들고 가는 여행이 당연하고 또 자연스럽다.

그렇다고 여행의 즐거움을 포기한 것도 아니다. 꼭 필요한 물건은 부족함 없이 챙겨가기에 불편함이 없다. 추가로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현지의 시장이나 마트를 찾게 되는데, 이런 과정마저도 여행의 또 하나의 재미다.

여행 중에 신기한 시선을 받을 때도 있다. 올 여름 캐나다에 갈 때는 인천공항 대한항공 직원에게서, 캐나다 입국심사관에게서, 또 숙소에서 하나 같이 ‘짐은 정말로 그게 전부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이게 전부’인 게 너무나도 당연했던 나로서는 재밌는 경험이었다.

높아진 기동성을 즐길 수 있게 된 점이 가장 좋다. 여행지에서도 몸에 잘 고정된, 부담스럽지 않은 무게의 내 백팩과 함께면 걷든 뛰든 계단을 오르든 다리의 자유로움을 한껏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돈을 절약하는 것보다 직접적으로 와닿는 장점이다.

기내용 가방 하나로 하는 여행 방법이 즐거운 여행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여행의 번거로움을 줄여주는 좋은 방법임은 분명하다. 부디 이 글을 읽는 다른 분들도 여행의 즐거움과 마음의 평화를 더 많이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영화 조커: 멋지지만 뒷맛이 씁쓸한

영화가 끝나고 스탭롤이 올라가는 동안 곰곰이 생각해봤다. 이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머리 속에 여러 생각이 맴돌았지만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아침 조조 영화를 보고 나온 후 한나절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글의 개요조차 잘 써지지 않아 이번 글은 의식의 흐름에 내맡겨볼까 한다.

이 영화를 굳이, 대충, 거칠게 정리해보면 두 개의 큰 줄기로 나뉜다. 정치-경제-사회 체제에 내재된 극심한 불평등과 모순이 결국 조커와 같은 괴물을 탄생시켰다는 사회적 줄기 하나, 그리고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위해 줄곧 억압해오던 자아를 해방시키고 나서야 고통에서 벗어나 그토록 바라던 행복을 자유로이 만끽할 수 있게 된 인간상이라는 개인적 줄기 하나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조커는 배트맨의 안티테제 역할을 수행하는 캐릭터다. 배트맨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고담 시티를 수호하는 영웅이다. 아무리 썩어 문드러졌을지라도 고담 시티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묵묵히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그에 반해, 조커는 무질서와 파괴의 상징이다. 조커에게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란 중요치 않다. 대신, 내면에 가득찬 욕망을 외부 세계를 향해 최대한 발산하고 투사함으로써 ‘존재함’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영화 <조커>는 괴팍하며 목적을 알 수 없는 캐릭터인 조커가 탄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그리고 아서 플렉이 조커로 변해가고 각성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불평등한 사회 속에서 억압 받는 자들의 군상과 그들이 마침내 봉기하는 모습은 작중에서 중요한 장치이자 배경으로 활용된다. 다만 그들의 싸움은 더욱 평등하고 공정하며 진보된 체제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맹목적인 폭력성만을 드러낼 뿐이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폭력, 방화, 약탈만 남는다.

그런 폭력을 영화 <조커>는 옹호한다. 다른 사람들이 붙여놓은 정신병자라는 딱지를 떼어내고 자신만의 선악의 기준을 발견한 바로 그 순간, 조커는 평생 그토록 원했던 지고의 행복을 맛본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의 분위기는 어두운 비극에서 밝은 희극으로 급전환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분명 비극임에도 극히 유쾌하게 표현된다. 선악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순간을 코미디로서 희화화해버렸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선악의 경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선을 넘어가도 좋다’고 속삭이는 훌륭한 그린라이트다. 조커가 족쇄를 풀어내고 각성하는 바로 그 장면에서 나 역시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차마 드러내지 못 하는 억압된 욕망과 좌절의 경험은 이 사회를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세계는 고담 시티라는 허구의 공간이지만 영화의 훌륭한 완성도 덕분에 극도의 현실감을 뿜어낸다. 계층 간의 격차와 사회적 갈등, 인물들의 감정선 역시 마찬가지라 자칫 과몰입하기 쉬울 정도다. 너무나도 훌륭해서 오히려 거리를 두고 봐야 하는 영화, 그게 바로 <조커>였다.

(2019년 10월 3일 목요일 오전 – CGV영등포 스피어X관)

망원동 멘지라멘 – 시오라멘, 파이탄라멘 (19.12.28 업데이트)

멘지라멘
시오라멘 9,000원
2019년 8월 24일 토요일 점심

관찰레와 판체타 사러 망원동 소금집델리에 찾아갔는데 판매하지 않는다고 해서 허탕치고 말았다. 모처럼 간 김에 점심이라도 먹고 올까 싶었지만, 정오가 채 안 된 시간인데도 이미 대기가 10팀 가까워서 그냥 돌아나왔다.

대신 합정역에서 소금집델리까지 가는 길에 눈에 띄었던 식당 중 한 곳을 골라 들어갔다. ‘자가제면’이라고 적혀있는 것 뿐만 아니라 제면기가 거리에서도 잘 들여다보이는 곳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던 라멘집이라 지나가면서도 기억에 남았던 집이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파이탄(白湯) 라멘 전문점이었다. 키오스크 메뉴판에도 가장 첫 메뉴로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런 줄도 몰랐다. 일단 사전 정보 없이 처음 들어온 라멘집이라 가장 기본이라고 생각한 시오라멘을 주문했다. 주문은 키오스크에서 메뉴 선택에서 결제까지 손님이 알아서 해결하고 주문서를 주방에 전달하면 되는 식이다.

좌석은 모두 다찌였다. 자리 중간중간마다 고추기름, 후추 등과 함께 머리 묶는 고무줄이 놓여있어 주인분의 센스를 짐작해볼 수 있었다. 좌석 뿐만 아니라 가게 전반적으로 깔끔해서 라멘 기다리는 동안 기분이 괜찮았다.

시간이 지나 라멘을 받아들었다. 라멘 나오기까지 체감상 시간이 꽤 걸렸던 것 같다. 막상 받아들고 보니 토핑이 아주 실해서 기대감을 높였다.

일단 라멘을 받아들고 나니 상큼한 시트러스향이 먼저 치고 올라온다. 라멘 위에 마무리로 뿌려진 노란 과일 껍질에서 올라오는 것 같았다. 양이 얼마 되어 보이지 않는데도 향이 아주 강렬했다. 자칫 너무 기름질 수 있는 라멘의 균형감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주었다. 다만 여러 토핑의 향을 골고루 느끼기에는 시트러스향이 너무 강하지 않나 싶기도 했다.

스프의 기저는 육고기 같았지만 쉽게 느껴지는 향은 해물의 감칠맛에 더 가까웠다. 기름은 적게 뜨는 편이었다. 여기에 잘게 썬 파가 올라가서 아주 진하기 보다는 부드럽고 다양한 층위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자가제면한 면은 내 취향보다는 약간 두꺼운 편이었다. 면은 심을 끊어내는 느낌이 느껴지는 정도로 적당히 삶겼다. 겉이 부드러워 스프를 살짝 머금어 어울림이 좋았다. 최근 주로 먹은 면이 아주 고소한 통밀 면이다보니 그만하지는 않았지만, 정성이 많이 들어간 게 역력히 느껴지는 좋은 면이었다.

이날 먹었던 라멘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차슈였다. 보통 라멘집에서 토핑으로 나오는 차슈는 두껍고 겉을 직화로 익혀내어 겉이 딱딱하고 지방이 가득한데, 이집의 차슈는 그렇지 않았다. 처음 받았을 때는 고기에 약간 붉은 기가 있어 덜 익었나 싶었다. 막상 먹어보니 놀랍도록 부드러운 식감에 감칠맛이 아주 풍부했다. 돼지고기 뿐만 아니라 닭고기 역시 전혀 퍽퍽하지 않고 부드러워서 입 안에 넣어 몇 번 씹자 스르르 풀려버릴 정도였다. 수비드로 조리하신 것 같은데, 막상 수비드 차슈를 먹어본 건 처음이라 아주 신기했다.

멘마는 양이 아주 넉넉해서, 멘마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아주 환영할만 했다. 썰어낸 조각의 크기와 두께가 아주 넉넉해서, 멘마의 아삭한 질감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구운 토마토는 라멘의 맛 자체에는 큰 영향이 없었던 것 같다. 그보다 붉은 색감 덕에 라멘이 더욱 시각적으로 다채롭고 맛있어보였다. 아지다마고는 간이 너무 짜지 않게 배어, 맛과 식감 모두가 부드러웠다.

개별의 재료들은 너무 튀지 않게 조리되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다채로움이 조금은 과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 심심한 것보다는 이쪽이 낫겠지만, 한 그릇의 라멘 안에서 너무 많은 걸 보여주시려고 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리 동네에 있었으면 매일 같이 찾아갔을텐데, 강 건너인게 약간 아쉽다. 합정역에서도 망원역 쪽으로 조금 걸어 들어가야 하니 주로 2호선 타야 하는 내 출퇴근 경로에서도 미묘하게 벗어나 있고. 그래도 다음번에는 파이탄 라멘 먹으러 가봐야겠다.


멘지라멘
파이탄라멘 9,000원
2019년 8월 31일 토요일 점심

이날은 선선해진 날씨 덕에 모처럼 브롬톤을 꺼내 타고 나왔던 날이었다. 한강을 건너 망원동, 연남동, 합정동을 천천히 돌아다니며 회사 생활에 지친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기 위함이었다.

돌아다니다보니 어느새 점심 먹어야 할 때가 되어, 바로 한 주 전에 갔었던 멘지라멘에 다시 들렀다. 브롬톤 보관에 대한 걱정이 있었는데, 다행히 가게 안쪽 복도에 넣어둘 수 있게 배려해주셔서 걱정 없이 식사할 수 있었다.

일부러 멘지라멘에 다시 온 이유는 파이탄라멘을 먹기 위함이었다. 소나 돼지로 낸 육수보다 닭육수를 좋아하는 취향인데다, 제대로 된 토리파이탄라멘을 먹어본지 너무 오래 되었다보니 기대가 컸다.

주문 후 잠시 기다린 끝에 파이탄라멘을 받아들었다. 눈으로 보기에도 아주 구수하고 진해보였다. 스프부터 먼저 한 입 맛을 봤다. 고소하고 감칠맛이 좋으면서도, 라멘치고 너무 기름지지 않아 끝맛이 깔끔하고 부담스럽지 않았다. 정갈하게 잘 우려낸 닭곰탕 같았다. 여기에 조금 더 복잡한 맛의 층위가 있었는데, 능력이 부족한 탓에 세세히 구분해 낼 수는 없었다.

간은 내 입맛에는 약간 센 편이었다. 라멘치고는 그렇게 강한 편이 아닌데다, 토핑들이 대체로 짜지 않아 짠맛의 밸런스는 나쁘지 않았다. 주방에 요청하면 간을 조절할 수 있게 도와주시는 모양인데, 이날은 이집에서 처음 파이탄라멘을 먹은 날이라 그대로 먹어보기로 했다.

면은 각진 사각형 모양으로, 식감과 탄력이 좋았다. 특히 지난주에 먹었던 시오 스프보다 파이탄 스프와의 궁합이 더 좋다고 느꼈다. 시오라멘을 먹었을 때는 깔끔하다는 느낌이었는데, 파이탄라멘에서는 중후한 스프의 풍미를 잘 받아내어 더욱 맛있었다.

수비드한 차슈는 역시 훌륭했다. 과하게 짜지도 않고, 토치로 구워낸 차슈처럼 겉이 딱딱하지도 않았다. 대신 부드럽고, 씹으면 달큰한 즙이 터진다. 돼지고기 뿐만 아니라 닭고기 차슈도 같이 제공되다 보니, 역시 닭의 느낌을 담은 파이탄 스프와 잘 어울렸다.

토핑은 시오라멘 대비 비슷한듯 달랐다. 파이탄라멘에는 유자껍질(추정)과 멘마가 올라가지 않았다. 지난번에 먹었던, 두껍게 썰어낸 멘마의 식감이 생각나서 주방에 여쭤보니 멘마가 파이탄라멘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넣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멘마를 따로 조금 내어주셨는데, 말씀대로 파이탄라멘과의 궁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하지 않았던 면 추가를 요청했다. 1인분을 요청했더니 처음 라멘에 들어있던 정도의 면이 다시 나왔다. 토핑으로 차슈와 대파도 얹어주셔서, 심심하지 않게 먹을 수 있었다.

갓절임과 고추기름도 조금씩 맛을 봤다. 갓김치는 입에 넣으면 처음에는 고소한 참기름향, 나중에는 알싸한 고추기름향이 올라온다. 씹을 때 조직에서 섬유가 찢어져 나오는 식감이 차졌다. 대체로 향이 강해서, 조금씩만 곁들이는 쪽이 좋았다.

고추기름은 생각보다 많이 매웠다. 그래서 라멘에는 몇 방울 정도만 넣어봤는데, 고소하고 부드럽던 스프맛에 자극적인 고추기름향이 가장 윗층에 더해져서 맛의 층위를 늘리는 효과가 있었다.

파이탄라멘은 기대만큼 맛있어서 스프까지 깨끗하게 비워내고 나왔다. 요즘 먹는 양이 줄어 정말 맛있는 집이 아니면 면 추가도 하지 않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즐겁게 먹을 수 있었다. 위치가 내 평소 동선에서 약간 벗어난 곳이라, 가려고 하면 결심이 필요하다는 점이 개인적으로는 좀 아쉽다.


멘지라멘
파이탄라멘 9,000원
2019년 12월 28일 토요일 점심

마지막 방문으로부터 한 달 쯤 됐나 싶었는데 블로그를 보니 지난 8월 방문이 마지막이었다. 역시 평소 출퇴근 동선에서 살짝 벗어나 있어 일부러 찾아가야 한다는 점이 어렵다.

몇 달 만에 와보니 달라진 점이 눈에 띈다. 일하는 분도 바뀌었고, 다찌 밖에 없었던 가게에 4~5인용 테이블이 하나 생겼다.

공식 인스타그램에 재료 소진으로 마감한다는 공지도 종종 보이곤 하는 걸로 보아 영업이 꽤 잘 되는 모양이다. 마음에 드는 가게가 영업이 잘 된다는 건 좋은 일이다. 적어도 다음번에 다시 찾아와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니까.

어쨌든 쌀쌀한 날씨에 뜨끈하고 끈적한 고기 국물이 먹고 싶었던터라 파이탄라멘을 주문했다. 면을 삶고, 물기를 털고, 토핑이 얹히고, 통후추 갈리는 소리가 나고 이내 라멘 한 그릇을 받아들었다.

돈코츠 못잖게 구수하지만 덜 부담스럽고 깔끔한 파이탄라멘이다. 수비드 장비에 대한 뽐을 선사했던 부드럽고 감칠맛 넘치는 챠슈도 여전히 좋다. 특히 면을 추가로 부탁드리면 챠슈에 대파까지 또 얹어주시는데, 정말 무료로 먹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푸짐하고 맛있다.

왠지 면이 조금 달라진 것 같기도 하다. 겉면의 거뭇한 점이 눈에 띄고, 씹을수록 고소함이 좀 더 강하게 올라오는 것 같다. 계절 탓일 수도, 기분 탓일 수도. 미각이 후달리니 구분하기가 어렵다.

어쨌든 한 그릇 잘 비우고 나왔다. 테이블이 생긴 덕에 홀이 약간 좁아져서 지난번처럼 브롬톤 타고 가면 민폐도가 올라갈 것 같다. 최대한 덜 귀찮으면서도 자주 찾아갈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밴쿠버 여행 3일차 (7 Jun 2019, Fri): 카필라노 서스펜션 브릿지 파크-린캐년 파크

친구집 @5:45

전날 너무 피곤해서 일찍 기절하듯 잠들었던 통에 한국에서 출근하는 날만큼 일찍 눈이 떠졌다. 창 밖을 내다보니 밤새 비가 왔던듯 바닥이 젖어있다. 이날은 아침부터 오후까지 계속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였다.

친구 말에 의하면 대체로 밴쿠버의 여름은 쨍하게 맑으면서도 덥지 않고 상쾌한 날씨인데, 유독 내가 밴쿠버에서 지낸 기간에 비가 잦았다고 한다. 그나마 맑았던 전날 미리 스탠리파크와 다운타운 여행을 끝내둔 게 다행이었다.

이날은 노스밴쿠버를 벗어나지 않고, 밴쿠버 북쪽에 있는 곳들을 가볍게 둘러볼 예정이다. 후보지는 카필라노 서스펜션 브릿지 파크(Capilano Suspension Bridge Park), 그라우스 마운틴(Grouse Mountain), 린 캐년 파크(Lynn Canyon Park)였다.

이날 계속 빗방울이 날려 날씨가 좋지 않았던데다, 전날 워낙 많이 걸었던 덕에 다리에 피로감이 남아있어 험준한 그라우스마운틴 대신 카필라노 서스펜션 브릿지 파크와 린 캐년 파크에 가기로 결정했다. 그 중에서도, 관광객이 특히 많이 몰리는 카필라노 서스펜션 브릿지를 최대한 이른 시간에 먼저 가보기로 했다.

론즈데일퀘이마켓 (Lonsdale Quay Market) @9:11

날씨가 궂다보니 바깥 공기가 꽤 쌀쌀하다. 친구네 집에서 아침을 못 먹고 나온터라 마켓 푸드코트에서 따끈한 고기 국물의 베트남 쌀국수를 주문했다. (Vietnamese beef noodle soup $7.9)

일단 따뜻한 국물을 들이키니 확실히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됐다. 육수는 깔끔하게 끊어지는 육향이 났다. 고기도 꽤 들어있었는데,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쫄깃거리는 식감이 재미있었다. 면은 맨날 먹던 그 쌀면이라 특이할 것이 없었다.

아침을 먹고 마켓 바로 옆에 있는 론즈데일퀘이 터미널에서 컴퍼스 카드에 데이패스를 충전했다. ($10.25) 캐나다 여행 중 데이패스를 세 번 충전했는데, 그 중 본전 뽑은 날은 버스 네 번 탄 이 날이 유일했다. 밴쿠버 도심이 좁은데다 여행 일정이 짧다보니 데이패스 본전 뽑기가 쉽지 않다.

다시 마켓으로 돌아와, 한켠에 있던 워터파운틴에서 물을 받았다. 이날은 하루 종일 산에 있을 예정이라 물을 잘 챙기는 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워터파운틴은 무료였고, 센서가 있어 물통을 가까이 대면 자동으로 물을 채워주는 식이라 편리했다.

카필라노 서스펜션 브릿지 가는 길 @9:50

론즈데일퀘이역에서 버스를 타고 카필라노 서스펜션 브릿지 파크로 향했다. 밴쿠버는 북미 도시치고 생각보다 대중교통망이 잘 구성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론즈데일퀘이역을 기점으로, 사방팔방으로 가는 버스 노선이 무척 많았고 배차 간격도 그리 길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야 할 때는 버저가 연결된 줄을 당기면 된다. 버튼을 누르는 게 아니라 줄을 당기면 된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카필라노 서스펜션 브릿지 파크 (Capilano Suspension Bridge Park) @10:10

일찍 온다고 왔는데, 아침 먹고 이것저것 하느라 비비적거렸더니 생각보다 늦게 도착했다. 덕분에 이미 공원 주차장은 전세 관광버스로 가득했다. 워낙 많은 관광객이 몰린다고 들었었기에, 예감이 좋지 않았다.

카필라노 서스펜션 브릿지 파크는 입장료가 유독 비싼 곳이었다. 미리 쿠폰을 인쇄해갔지만, 할인액은 고작 $2에 불과했다. ($54.55)

죽기 전에 꼭 봐야 하는 곳으로 꼽혔다는 카필라노의 현수교는 막상 가보니 별 감흥이 없었다. 사람, 특히 중국계 단체 관광객이 워낙 많아서 다리 위는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였기에 더욱 그랬다. 다리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아찔한 높이의 협곡이 주는 스릴이 있었지만, 그런 즐거움은 다른 관광지에서도 흔히 느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보다, 숲이 정말 좋았다. 수백 년에서 천 년 이상된, 이끼를 뒤집어쓴 빽빽한 침엽수림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바닥의 부엽토 틈에는 민달팽이가 기어다니고, 온갖 새들이 지저귀고,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까지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숲의 생태에 대한 안내 역시 잘 되어 있었다.

다만 역시 이 곳의 문제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거다. 다리 위에서 멈춰서 셀피 찍는 사람들 때문에 다리 건너는 줄은 자꾸만 정체되고, 숲에서 시끄럽게 서로를 부르며 대화하는 사람들 때문에 잔잔한 숲의 소리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인파를 헤치고 카필라노 서스펜션 브릿지 파크를 한 바퀴 돌고 나니 시간은 두 시간 정도가 지나있었다. 공원 입구로 돌아나오고 보니, 내가 입장할 때는 없었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만약 이 공원에 온다면, 역시 가능한 이른 시간에 오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노스밴쿠버에서 출발했기에 이용하지 않았지만, 공원에서 밴쿠버 다운타운까지 왕복하는 무료 셔틀버스도 있었다. 셔틀버스를 타기 위한 줄 역시 꽤 길게 늘어서 있었는데, 하긴 얼마나 사람이 많으면 이렇게 인건비 비싼 곳에서 무료 셔틀버스까지 운행할 수 있겠는가. 조금 씁쓸해지는 대목이었다.

론즈데일퀘이마켓 @12:25

다시 버스를 타고 아침에 출발했던 론즈데일퀘이마켓으로 돌아왔다. 카필라노에 머무르는 동안 날이 점점 개더니, 이제는 파란 하늘을 내보이며 아주 화창한 날씨가 됐다.

점심 식사는 마켓 안에 있는 Bowen Island라는 피자집에서 해결했다. 주문한 메뉴는 ‘Two River’s Lamb’ 두 조각이었다. ($6.05) 맛은 기가 막혔다. 양고기, 블루치즈, 토마토향이 서로 지지 않으려는듯 강렬하게 올라왔는데, 그러면서도 조화가 훌륭했다. 도우도 적당히 잘 구워져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전날 채 풀지 못한 피로 때문인지 아니면 맛있는 피자를 배불리 먹었던 덕분인지 점심을 다 먹고 나오니 피로가 급 몰려왔다. 아직 밴쿠버에서 만 하루를 더 있어야 했기에 론즈데일퀘이터미널에 있는 편의점에서 몬스터 제로슈가를 한 캔 사서 도핑을 시도했다. ($4.25) 점원은 한국계로 보이는 젊은이였는데, 아주 친절하게 응대해줘서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다시 워터파운틴에서 물을 받았다. 준비를 다 마치고서 버스를 타고 린 캐년 파크로 출발했다.

린 캐년 파크(Lynn Canyon Park) @13:53

린 캐년에 도착했다. 공원 초입까지 버스가 운행되어 편했다. 버스에서 내려서는 구글맵을 켜보는 대신, 같이 내린 사람들과 같은 방향으로 졸졸 따라가보니 공원 초입이 나타났다.

린 캐년 파크를 도는 여러 코스 중 ‘Lynn Loop‘라는 코스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따라가보기로 했다. 지도를 보니 린 캐년에서 두어 시간 정도를 보내기 딱 적당한 거리의 코스에, 이름 붙여진 곳들을 고루 둘러볼 수 있는 코스 같았다. 실제로 걸어보니 거리가 너무 짧아, 그보다 위에 있는 Rise Lake까지 천천히 돌고 왔는데도 두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공원 입구로 들어가니 여러 경고문이 먼저 눈에 띈다. 올바른 장비를 갖추라는 것, 강으로 다이빙하지 말라는 것, 그리고 곰 조심. 새삼스레 내가 캐나다에 와있는 게 다시금 실감난다. 곰 조심이라니, 동아시아에서는 홋카이도 외에서는 본 적 없는 경고이기는 하다.

Lynn Loop의 시작은 카필라노에 있는 것과 비슷하지만 조금 작은 현수교(Suspension Bridge)다. 린 캐년의 현수교 역시 깎아지르는듯한 계곡 위로 아슬아슬 지나가는 스릴이 카필라노의 것 못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은 훨씬 적어 이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다만 사람이 적다보니 바닥에 미끄럼 방지 처리가 덜 되어 있어, 비 온 뒤에 오니 많이 미끄러웠다.

본격적으로 등산로에 접어들었다. 지금까지 트래킹 다니면서 이렇게 잘 되어 있는 등산로는 처음 보는 것 같다. 등산로를 알아보기 어렵지 않도록 나무가지마다 표지가 붙어있고, 등산로 자체도 넓고 평탄하며 자갈과 부엽토가 두껍게 깔려 밟기도 좋고 비 온 직후에도 물이 잘 빠져있었다. 경사도 심하지 않아, 등산로라기보다 산책로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나에게 이번 밴쿠버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을 꼽으라면, 린 캐년 파크에서 즐겼던 오후의 산책이었다. 특히 숲이 아주 인상 깊었다. 곧고 높게 자란 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온대우림은, 한국의 산들과는 사뭇 다른 신비한 분위기를 풍겼다. 바닥 뿐만 아니라 오래된 나무 나무 줄기, 가지에까지 자리 잡은 이끼들, 습하지만 서늘한 공기, 인적 없이 가끔 새 소리만 울려펴지는 고요한 숲 속은 마치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소설 속에 와있는듯 했다.

커다란 나무들 사이로 부러져 쓰러진 고목들 위로 다시 풀과 이끼가 자라고, 그렇게 서서히 바스라져 사라진 자리에 다시 묘목이 자라나는 숲의 순환도 볼 수 있었다. 경탄할 수 밖에 없었다. 소로우가 <월든>을 쓸 때 지냈던 숲 역시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Lynn Loop를 벗어나 Rice Lake 쪽으로 가는 도중, Seymore Valley Trailway와의 갈림길 근처에서 한 할아버지를 만났다. 길가에서 나무열매를 따서 드시고 계시기에 가볍게 인사했더니, 먹어보라며 열매를 한움큼 건네주셨다. 자세히 보니 산딸기였는데, 아직 익은 것도 있고 덜 익은 것도 있었지만 맛은 나쁘지 않았다.

좀 더 올라가다보니 Flume Line이라는 것도 있었다. 나무를 짜맞추어 만든 후룸라이드 코스처럼 생긴 구조물이었는데,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여기에 물을 흘려 목재를 떠내려 보내는 식으로 사용한 수송 수단의 흔적이라고 한다. 목재와 물 모두가 풍부한 지역에서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확실히 이 지역에서는 가능할 것 같다.

Rice Lake는 생각보다 큰 호수였다. 주변으로 다람쥐가 뛰어다니고, 늪 근처로 새와 벌레 우는 소리가 아름다웠다. 호수 바닥에 가라앉은 유목들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듯한 인상을 줬다.

낚시 안내 표지판으로 미루어보다 무지개송어도 사는 모양이다. 호수를 도는 동안 낚시꾼을 여러 번 만날 수 있었는데, 진지하게 낚시 중인 분들이 반, 여럿이 모여 한참 얘기 중인 분들이 반 정도였다.

Rise Lake를 지나 다시 Lynn Loop로 돌아왔다.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고 있으니, 내려가는 길은 린 크릭을 따라 물 소리를 들으며 가는 길이다. 아무래도 군데군데 절벽 섞인 물가이다보니, 올라왔던 길보다는 가파른 곳이 몇 군데 있었다. 낙상을 막기 위한 펜스도 길을 따라 쭉 쳐져 있었다.

이내 Pipeline Bridge를 만났다. 현수교에 비하면 특별히 볼 건 없는 다리다. 이 다리를 건너면 굳이 현수교까지 돌아가지 않고도 린 캐년을 빠져나갈 수 있다. 아직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계속 Lynn Loop를 따라 내려가기로 했다.

조금 내려가다 보니 30피트 풀(30 Foot Pool)을 만났다. 밴쿠버 오기 전 참고를 위해 봤던 유튜브 채널에서는 유튜버가 다이빙하기도 했던 곳이다. 막상 가보니 한국 기준으로 딱 놀기 좋으면서도 갑자기 깊어지는 곳이 있어 사고 나기도 좋은 계곡이었다. 물에 손을 담궈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 한여름에도 여기 뛰어들려면 많은 용기가 필요할 것 같다.

30피트 풀에서 내리막길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다 보니 처음 출발했던 현수교로 되돌아왔다. 오후 2시쯤 출발해서 4시쯤 도착했으니, Rice Lake까지 갔다왔음에도 두 시간 정도 밖에는 걸리지 않았다.

아직 시간과 체력에 여유가 있어, 이번에는 하류 쪽에 있는 트윈폴스 브릿지(Twin Falls Bridge)까지 가보기로 했다. 지도를 보니 그쪽에서 센테니얼 트레일(Centennial Trail)을 통해 강 건너에서 다시 현수교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트윈폴스 브릿지로 가는 길은 인적 드물었던 린 캐년보다도 더욱 사람 찾아보기 힘들었다. 걷는 동안 마주친 사람이 두어 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숲 속은 더욱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공기가 워낙 서늘하고 습해서, 초여름임에도 입으로 숨을 쉬자 입김이 날 정도였다.

트윈폴스 브릿지를 건너고 보니, 원래 가려고 했던 센테니얼 트레일이 공사 때문에 폐쇄되어 있었다. 대신 오솔길 같은 느낌의 Ross Rd를 여유로이 걷다보니 어느새 린 밸리의 주택가와 포장된 도로를 만날 수 있었다. 여기부터는 구글맵의 도움을 받아 근처의 버스 정류장을 찾아가서 버스를 잡아타는 것으로 이날 린 캐년 여행을 끝냈다.

린 캐년은 지금 생각해봐도 밴쿠버 여행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곳이다. 다시 밴쿠버에 간다면 린 캐년에는 하루 이상의 시간을 들여 천천히 숲 속을 거니는 시간을 마련하고 싶을 정도다. 짙게 우거진 온대 우림의 조용하고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마치 한국에서 남산이나 북한산 가는 정도의 감각으로 즐길 수 있다는 건 밴쿠버의 큰 장점 중 하나인 것 같다.

론즈데일퀘이터미널(Lonsdale Quay Terminal) @17:32

린 밸리에서 버스 타고 다시 론즈데이퀘이 터미널로 돌아왔다. 그새 날씨가 확실히 갰다. 새파란 하늘에 깃털 같은 구름 아래로 바라보이는 바다와 밴쿠버 다운타운이 멋졌다.

근처에서는 금요일 저녁을 맞아 야시장(Shipyards Friday Night Market)이 열린 모양이다. 사람이 북적이고 음악 소리도 들리고, 여기저기 입간판도 세워져 있었다.

원래 계획은 친구가 퇴근하고 올 때까지 탭앤배럴(Tap and Barrel) 같은 곳에서 혼자 맥주 마시고 있으려고 했는데, 린 캐년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보니 해피아워를 놓쳐버렸다. 대신 Parlour라는 로컬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낸 푸드트럭에서 블루베리&라즈베리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들고서($5.5), 신나는 헤비메탈 공연을 구경했다.

공연 구경하다보니 신나는 리듬에 아이들이 여럿 어울려 춤추고 놀고 있었다. 잘 보니 백인, 인도계, 동양계 아이들이 비슷한 비율로 뒤섞여있었다. 영미권 중 밴쿠버는 동양계 비율이 높고 인종차별 덜한 곳이라고 들었는데, 그 상징 같은 장면처럼 다가왔다. (그렇다고 인종차별이 없는 건 아니라는 게 함정이지만.)

딥 코브(Deep Cove) @18:40

이후 퇴근하고 온 친구네 부부를 만나 푸드트럭에서 앵거스 비프 랩 두 개를 테이크아웃($20)해서 들고, 차로 딥 코브(Deep Cove)로 건너와 파노라마 공원(Panorama Park)에 자리를 잡았다.

전날 갔던 서쪽의 웨스트밴쿠버와는 정반대인 동쪽에 있는 곳이라, 해가 서쪽 산 능선을 따라 넘어가고 있었다. 덕분에 비슷한 시간대인데도 해가 훨씬 빨리 지는 느낌이었다. 넘어가는 해를 등지고 바라본 바다 주변으로는 침엽수 가득한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지고, 요트들이 한가로이 떠 있어 그림 같았다. 조용한 가운데 바람 소리, 잔잔한 파도 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이완되는 기분이었다.

친구집 @20:54

다음날이면 이제 짧은 밴쿠버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짧은 여행이 아쉬워 친구집에서 조촐한 술자리를 가졌다. 살짝 알딸딸한 채로 친구네 부부와 같이 유튜브를 보며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누는 시간이 즐거웠다. 그렇게 밴쿠버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갔다.


2019 캐나다 밴쿠버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