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사실 런던 여행이 결정된 시기는 해외여행에 대한 회의가 한창일 때였다. 큰 돈과 시간을 들여 멀리 나가봐야 별반 느껴지는 건 없고 몸만 힘들다는 생각이 쌓이다보니, 나이가 들수록 어디 돌아다니는 것보다 그냥 집에서 책 읽고 요리하며 쉬는 게 어느 측면에서 보나 더 좋다고 느끼던 참이었다.
그럼에도 여행의 기회란 의도치 않은 시기에 불쑥 생겨나곤 한다. 이번 여행의 계기가 정말 그랬다. 대한항공 가족 마일리지가 유럽행 일등석 좌석을 살 수 있는 정도로 쌓였고, 선택 가능한 행선지 중 가장 먼 곳 중 하나가 바로 런던이었다. 이번 런던 여행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결정됐다.
여행 준비
항공권 및 숙소
이번 여행만큼은 항공권과 숙소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내가 대부분 알아서 준비해줬기 때문이다.
항공권은 인천에서 런던까지는 대한항공 일등석을, 돌아올 때는 영국항공 이코노미석을 예약했다. 대한항공 일등석은 장거리 노선을 누워서 갈 수 있는 장점 외에도 악명 높은 영국 입국 심사 때 Priority Line을 이용해서 시간 절약할 수 있었던 점이 특히 좋았다. 돌아오는 영국항공 이코노미석도 생각보다 탈 만 했다. 그나마 마일리지 50% 할인 이용해서 발권 받은 항공권이라 가성비 측면에서는 좋았던 것 같다.
숙소는 Doubletree by Hilton London Chelsea로 잡았다. 런던은 숙박비가 워낙 비싸 숙소를 시티나 웨스트민스터에서는 좀 떨어진 곳으로 정했다. 그나마 아내가 Price Challenge를 끈질기게 한 끝에 숙박비를 좀 더 아낄 수 있었다.
숙소 근처에는 오버그라운드를 탈 수 있는 Imperial Wharf 역과 버스정류장이 몇 있었다. 런던은 대중교통이 워낙 잘 되어 있어 일단 오버그라운드든 언더그라운드든 탈 수 있는 역 근처이기만 하면 놀러다니는데 별 불편함은 없었다.
여행 계획
얼마 전에 썼던 여행 준비: 여행 계획 짜기의 예시에 이번 런던 여행 일정을 짰던 방법이 포함되어 있다. 굳이 다시 정리하자면, 이런 순서로 일정을 짰다.
- 영국, 잉글랜드, 런던에 대한 책이나 자료들을 찾아 읽으며 가보고 싶은 곳들을 정리
- 구글맵에서 ‘가고 싶은 곳’ 지정 후 가까운 곳들끼리 그룹핑 및 목록화
- 목록에 각 장소마다 영업시간, 휴무일, 교통편 등을 확인한 후 일정 구체화
특히 런던 이야기: 천 가지 역사를 품은 살아 있는 도시라는 책이 유용했다. 자료 조사 단계에서는 가이드북보다는 역사서를 더 선호하는 편인데, 중간중간 장난치는 듯한 문체가 조금 거슬렸지만 개별 도시의 역사를 책 한 권으로 훑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도움이 됐다.
그 외 각 여행지의 예상 소요시간은 구글과 트립어드바이저를, 시내 교통편에 대한 세부 정보는 역시 구글맵과 CityMapper 앱을 이용했다.
여행 비용
미리 지불한 항공권과 숙소 비용을 제외하면, 성인 두 명이 런던에서 일주일 동안 여행하는 비용으로 120만원 정도 들었다. 환전은 인터넷 환전 한도(100만원)을 꽉 채워 환전했더니 650파운드 정도를 가지고 갈 수 있었다. 런던의 물가가 워낙 비싸다보니 환전해간 현금은 단 1페니도 남기지 않고 다 썼고, 여기에 신용카드로 20만원 정도를 더 쓰고 왔다. 그나마 신용카드가 대부분의 장소에서 잘 통용되어 추가 환전이나 출금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나마 할인 혜택은 어느 정도 챙겨본 편이다. 히드로 공항과 런던 도심 간의 이동은 피카딜리선 대신 빠르고 넓고 편한 히드로 익스프레스를 이용했다. 90일 전에 미리 예약하면 할인폭이 70% 이상이라 부담이 적다. 특히 아내와 둘이 간 여행이었기에, 둘이 가면 한 명 요금이 공짜인 내셔널 레일의 2-for-1 할인을 활용할 수 있었다. 런던 탑, 세인트폴 대성당, 웨스트민스터 수도원, IWM 처칠 워룸에서 총 100파운드 가까운 입장료를 할인받았다.
내셔널 레일 2-for-1 할인 이용하기
런던 여행에서 있어 가장 금전적으로 이득을 가장 많이 본 프로그램이 내셔널 레일 2-for-1 바우처다. 어차피 런던에 며칠 이상 머무를거면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Weekly travelcard를 구입하게 되는데, 이를 이용해 교통비 절약은 물론 많은 관광지에서 입장료 할인을 받을 수 있다.
요령이 잘 정리된 페이지를 미리 정독하고 간 덕분에 그리 어렵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 까다로운 점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2-for-1 offer가 런던 대중교통을 관할하는 TfL이 아닌, 내셔널 레일에서 주관하는 프로그램이라는 점이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교통공사와 코레일의 차이 정도) 때문에, 반드시 내셔널 레일(또는 GWR) 창구에서 종이로 된 Travelcard를 구입해야 하며, 오이스터 카드에 Travelcard를 충전하면 안 된다.
몇 군데 안 되는 종이 Travelcard를 구입할 수 있는 역에 굳이 찾아가야 하고, 대부분의 기차역이 튜브역도 겸하고 있기에 TfL의 자판기나 창구에 낚이지 말고 내셔널 레일 창구를 잘 찾아가야 하는 난제도 있다. 그나마 히드로 익스프레스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종점역인 패딩턴역에서 구입할 수 있어 덜 불편하다.
그리고 종이 Weekly travelcard를 구입하려면, 여권 사진 1장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진 자판기에서 만들어도 되지만, 미리 챙겨가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마지막으로, 종이 Travelcard는 구식 마그네틱 방식이라 외부 전자기장에 의해 손상되기 쉽다. 반드시 스마트폰이나 다른 전자제품들과 분리해서 보관하자. 내 경우, 구입하자마자 개찰구에서 제대로 인식되지 않아서 매번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야만 했다.
여행 짐싸기
여행 짐을 싸는 것에는 나름의 원칙이 있어, 그에 따라 준비했다. 이번 여행짐은 35L 짜리 백팩을 70% 정도 채우는 정도로, 그리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구성의 봄옷 위주로 준비했다.
다만, 막상 런던에 가보니 숫자로 보이는 기온보다 훨씬 추웠다. 워낙 날씨가 변화무쌍하고 갑작스런 비바람이 잦았기 때문이다. 긴팔 셔츠에 바람막이 정도를 들고 갔더니 하루종일 덜덜 떨며 다니다 결국 감기까지 걸렸다. 덕분에 부랴부랴 외투(바버 왁스재킷)을 구입하느라 예상 외의 큰 지출마저 있었다.
런던이나 영국 여행을 준비할 때는 기온에 따라 쉽게 덧입거나 벗어버릴 수 있는 옷들을 꼭 챙겨야 할 것 같다. 특히 짧고 굵게 내리는 비가 잦은데, 워낙 좁고 붐비는 도시라 우산 쓰고 다니기보다는 후드 달린 방수 재킷 쪽이 편했다. 현지인들도 우산보다는 후드를 찾아서 쓰거나 그냥 맞고 다니는 경우가 많아보였다.
여행 후기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19세기에 시간이 멈춘 나라라는 느낌을 받았다. 도로는 마차가 다니던 좁은 길을 그대로 포장해서 쓰고 있고,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새로 지은 건물이 하나도 없어보이는 동네도 많았다.
물가는 끔찍하게 비쌌다. 특히 숙박비, 외식비, 교통비가 비싸다보니 여행자로서의 체감 물가는 더욱 비싸게 느껴졌다. 그나마 많은 유명 박물관이 무료이고, 2-for-1 offer 같은 할인 혜택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어 다행이었다.
음식에 대해서는 너무 겁먹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생각보다 먹을만 했다. 런던은 대도시이다보니 영국 전통요리보다는 세계요리 식당이 많고, 전세계에서 몰려든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다보니 그렇지 않을까 싶었다.
날씨는 정말 지랄맞았다. 나름 하이시즌에 가까운 숄더시즌에 잘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해가 쨍쨍하다가도 수시로 구름 끼고 비가 쏟아진다. 중간중간 불어주는 찬바람은 덤이다. 방심하지 말고 방풍, 방수, 보온되는 옷을 잘 챙겨입고 다녀야 할 것 같다.
생각보다 LTE가 잘 안 터진다.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아예 안 된다고 보는 게 맞고, 도심 거리 한복판에서도 전파가 약하거나 끊기는 일이 잦았다.
크고 유명한 박물관이 많지만 정작 자기네들 유물은 별로 없다. 대영박물관에 영국 것은 건물 밖에 없다는 유명한 이야기처럼 말이다. 설령 영국 유물이 있더라도 비슷한 시기의 다른 나라 유물에 비하면 좋게 말하면 수수하고 나쁘게 말하면 시선이 잘 안 가는 것들이 많았다. 이런 상황이니 입장료를 안 받는 건 최소한의 양심이라고 느꼈다.
이번 여행의 주 목적은 박물관 관람이었다. 때문에 박물관에 꽤 넉넉한 일정을 할당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계속 시간에 쫓겨야 했다. 특히 대영박물관은 하루를 몽땅 투입했지만 1층조차 다 보지 못 했고, 내셔널 갤러리 역시 하루 종일 봤지만 일부 전시실을 못 봤다. 다음에 다시 온다면, 순수히 박물관 투어에만 7일 이상을 써도 좋을 것 같다.
런던을 돌아다니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교통문화다. 좁은 도로가 많아서인지 보행자가 있으면 운전자들이 거의 항상 양보해줬다. 오토바이가 없는 대신 자전거가 아주 많았는데, 다들 헬멧을 잘 갖춰쓰고 있었고 패니어 달린 자전거도 많았다. 역시 자동차들이 자전거를 많이 배려해준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