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여행 6일차 (9th May 2019, Thu): 웨스트민스터 (웨스트민스터 사원-IWM 처칠 워룸-옥스퍼드 서커스)


2019 런던 여행


DoubleTree by Hilton Chelsea @7:48 (BST)

호텔 창문으로 보이는 풀럼 지역의 아침

전날 비가 많이 왔었는데 이날 아침은 화창했다. 물론 이제 런던 날씨에도 조금씩 익숙해지던 터라, 언제든 거센 비바람이 불 수 있는 전제 하에 외출 준비를 했다. 방수 되는 가방과 신발, 이틀 전에 산 왁스 재킷을 챙겨입고 우산도 따로 챙겼다.

이날 오후에는 특히 비가 거세게 내렸고 바람도 많이 불었었다. 완전히 생쥐꼴이 된 사람들도 많이 봤는데, 나는 준비를 잘 했던 덕분에 발이 젖거나 추위에 떨지 않을 수 있었다.

런던 와서 걸린 감기는 아주 제대로여서, 약을 챙겨먹는 와중에도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았다. 특히 기침 때문에 밤새 잠을 잘 자지 못 했다. 그나마 전날 테스코 익스프레스에서 구입해서 쟁여놓은 생수 12병 덕분에 계속 물을 마시며 버틸 수 있었다. 나 뿐만 아니라 아내도 전날까지 워낙 많이 걸었다보니 힘들어했다.

그래서 이날 원래 계획대로라면 웨스트민스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후 숙소로 오는 길에 첼시에 있는 국립육군박물관(National Army Museum)에 들를 예정이었지만, 일정을 조정해서 국립육군박물관 대신 옥스퍼드 서커스에 잠시 들렀다 일찍 숙소로 돌아오기로 했다.

버스 타고 웨스트민스터 가는 길 @9:38 (BST)

계획대로라면 웨스트민스터 사원 입장 시작시간인 9시 전에 웨스트민스터에 도착했어야 했는데 출발이 늦었다. 나와 아내 둘 다 몸이 별로 좋지 못했던 탓이다.

종이 트래블카드가 계속 튜브 개찰구에서 인식이 안 된다. 덕분에 굳이 개찰구에 트래블카드를 인식시켜야 하는 튜브보다 기사에게 보여주면 그만인 버스를 더 선호하게 된다. 이날도 버스를 탔고, 윗층 덱 맨 앞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덕분에 가는 길에 런던의 평일 아침을 잘 둘러볼 수 있었다.

런던에 온 이래 적어도 도심에서는 오토바이를 거의 보지 못 했다. 대신 자전거가 정말 많았다. 대부분 헬멧을 쓰고, 교차로에서는 다들 수신호도 능숙하게들 했다. 자전거 중에서도 브롬톤이 꽤 많았는데, 다양한 마개조가 횡행하는 한국과는 달리 거의 순정 그대로 타는 걸로 보였다. 도로는 유독 폭이 좁아보였고, 로터리와 일방통행, 버스와 자전거 전용 신호 등도 자주 눈에 띄었다.

빅벤은 공사 중

원래 웨스트민스터에서 꼭 가봐야 할 곳 중 하나는 빅벤(Big Ben)이 딸린 웨스트민스터 궁전(Westminster Palace)다. 영국의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는 건물인데, 워낙 낡고 위험해 수 년 간에 걸친 공사가 진행 중이라 외부를 제대로 보기 어려웠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가는 길에 잠시 스쳐지나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의회가 열리지 않는 토요일에는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일부가 외부인에게 개방되는데, 이번 런던 방문 일정이 토요일에 들어와서 그 다음주 토요일에 나가는 일정이라 시간이 맞지 않아 방문을 못 했다. 특히 BBC PMQ(Prime Minister’s Questions)를 즐겨봤던 터라 그 현장을 직접 보고 싶었는데 보지 못해 아쉬웠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Westminster Abbey) @10:17 (BST)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입장 개시 전에 미리 도착해서 줄 서 있으려고 했는데, 조금 늦게 도착했더니 아주 긴 줄을 만났다. 소매치기가 많은지 대기열 근처에 주의 표시가 여기저기 서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고딕 양식의 건물 외장도 아주 멋져서, 줄 서 있다 경치에 정신 팔려 있다 보면 주머니를 털려도 쉬이 알아채기 어려울 것 같다.

줄 서 있는 동안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분명 아침에 나올 때는 화창했었는데, 역시 런던 날씨의 변덕스러움은 어디 가지 않는다. 우산 대신 재킷의 후드를 뒤집어쓰고 버티다 보니 어느새 입장할 수 있었다. 입장료는 2-for-1 바우처를 이용해 반값 할인을 받았다. (£23.00) 줄 서 있는 동안 바우처의 빈칸을 미리 채워두었더니 금새 처리가 됐다.

입장료에 포함된 멀티미디어 가이드는 한국어도 지원한다. 왠지 한국어 가이드 화자가 외국인인듯 특이한 억양이었다. 알아듣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 무엇보다 다른 곳들의 오디오 가이드와 마찬가지로 내용이 충실해서 마음에 들었다.

사원 내부는 사원 외부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고딕 양식의 아름다움을 한껏 만끽할 수 있는 구조였다. 여기에 다양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성화, 목조 구조물들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많았던 건 무덤이었다. 세인트폴 성당에도 무덤이 많았지만,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시선 가는 곳마다 무덤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잉글랜드 왕가의 무덤처럼 크고 넓은 자리를 차지한 것도 있었고, 성당 바닥에 박힌 묘석이 그간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취 덕에 닳고 닳아 거의 알아볼 수 없는 것들도 많았다.

그 중에서도, 굳이 멀티미디어 가이드의 도움을 빌리지 않더라도 아이작 뉴턴, 윌리엄 톰슨(캘빈 남작), 폴 디랙, 어니스트 러더퍼드, 조지프 톰슨, 마이클 패러데이, 제임스 맥스웰, 스티븐 호킹 등 물리학 거장들의 무덤 또는 명판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들의 업적 위에 현대 과학이 우뚝 서있듯, 그들이 묻힌 자리를 뒷세대 사람들이 찾아와 추모하며 영감과 동기부여를 받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은 전쟁 전몰자들의 이름을 눈에 잘 띄는 곳 여기저기에 많이 남기고 또 기려준다는 인상을 받았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웨스트민스터 내에서 유일하게 발에 밟히지 않는 장소로 알려진 무명 용사의 무덤 외에도, 참전 군인들을 기리기 위한 곳들이 꽤 눈에 자주 띄었다.

멀티미디어 가이드를 따라가는 투어는 한 시간 정도 걸렸다. 멀티미디어 가이드에 포함되지 않은 공간들을 추가로 둘러보는 시간과, 줄 서는 시간까지 총 두 시간 정도면 여유 있게 둘러볼 수 있을 것 같다.

투어 중에는 화장실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없으며,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그럼에도 카메라를 꺼내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동아시아계였는데, 왜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지 모르겠다.

Osteria dell’Angolo @12:45 (BST)

웨스트민스터역에서 마셤가(Marsham Street)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찾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구글맵이나 트립어드바이저 등에서 보기로는 가격이 꽤 비싸지만 돈값하는 곳이라고 했는데, 먹어보니 틀린 평이 아니었다.

식전빵이 꽤 넉넉하게 나왔는데, 같이 나온 올리브 오일의 질이 아주 좋아서 기대가 더욱 높아졌다. 이어 나온 파스타들도 아주 훌륭했다. 메뉴판이나 영수증 사진을 찍어두지 않아 정확한 메뉴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토마토와 치즈의 강렬한 맛이 휘몰아쳐서 강렬한 감칠맛을 혀에 남겼다. 파스타는 핸드메이드로 만든다고 했는데, 노른자로 반죽한 생면 특유의 맛과 식감을 한껏 즐길 수 있었다. (£32.51, Service Charge 12.5% 포함)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 처칠의 전시내각 박물관 (IWM Churchill War Rooms) @13:51 (BST)

점심 식사 후, IWM 처칠 워룸으로 향했다. 식사하러 남쪽으로 꽤나 내려왔는데, 처칠 워룸은 웨스트민스터 사원 근처라 다시 북쪽으로 걸어 올라가야 했다.

런던에서는 방수가 정말 절실하다

점심 먹는 동안 반짝 맑았던 날씨가 다시 험악해지며 비를 어마어마하게 쏟아냈다. 처칠 워룸 앞에 길게 늘어선 입장 대기줄 때문에 비를 쫄딱 맞으며 기다려야만 했다. 그나마 작은 우산과 방수되는 외투, 가방, 신발을 잘 챙겼던 덕분에 큰 불쾌함 없이 기다림의 시간을 젖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다.

처칠 워룸에서도 2-for-1 바우처를 사용해서 한 명치 입장료로 두 명이 입장할 수 있었다. (£22.00) 입장료에는 오디오 가이드 포함되어 있다. 다만 한국어는 지원되지 않는다. 대신 영어 가이드를 들었는데, 비교적 느리고 또박또박하게 읽어주어 알아듣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각 전시물마다 설명도 충실히 붙어있었다. 간단한 요약을 보고 싶을 때는 전시물의 설명을,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을 때는 오디오 가이드를 주의 깊게 들어보는 쪽이 도움이 됐다.

전시물은 2차대전사 또는 윈스턴 처칠 개인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아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 윈스턴 처칠 개인에 대한 내용도 아주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었고, 2차 대전기 중 실제 영국 전쟁 내각의 다양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오디오 가이드를 적당히 들어가며 둘러보는데는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아내가 많이 힘들어해서 조금 서둘러 나왔는데, 오디오 가이드의 내용을 모두 들어가며 충분히 또 꼼꼼히 즐기려면 두세 시간 이상 잡아야 할 것 같다. 윈스턴 처칠에 관심이 있다면 영상이나 연설 등을 듣는데 시간이 훨씬 더 많이 걸릴 수도 있겠다.

옥스퍼드 서커스 (Oxford Circus) @15:52 (BST)

처칠 워룸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옅게 흩날리고 있었다. 우산을 쓰기도, 안 쓰기도 애매한 그런 날씨였다.

원래는 국립육군박물관(National Army Museum)에 갈 예정이었지만, 나는 감기가 심했고 아내는 체력이 방전되어 오늘의 박물관 투어는 여기까지만 진행하기로 했다. 대신, 길거리나 가게들을 가볍게 둘러보고 저녁도 먹을 요량으로 버스를 타고 옥스퍼드 서커스로 갔다.

날씨가 꽤 궂은데도 옥스퍼드 서커스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런던에서도 손꼽히는 번화가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을만큼 번화하고 다양한 상점들이 성업 중이었다. 뉴욕 타임스퀘어의 전광판만큼 유명한 옥스퍼드 서커스의 전광판 역시 이날 또 구경할 수 있었다.

한참 거리를 둘러보다 셀프릿지스 런던(Selfridges London)에 들어갔다. 런던에서도 손꼽히는 백화점 중 하나라고 하는데, 하이엔드 브랜드 가게들이 많았다. 중국인과 한국인이 많이 보였는데, 다들 커다란 쇼핑백을 대여섯개씩 팔에 걸고 다니는 점이 신기했다.

쇼윈도도 단순히 상품만 진열해둔 게 아니라 좀 더 명확한 주제를 표현하고 있었다. 특히 팻맥그라스랩(PAT McGRATH LABS)의 마치 철왕좌처럼 생긴 네온 장식물이 눈길을 끌었다.

Windmill Mayfair @17:07 (BST)

옥스퍼드 서커스에서 조금 걸어, 파이가 유명하다는 영국식 펍에 왔다. 런던에 왔으면서도 정작 펍에서 제대로 식사를 해본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그 전에 시도를 안 해본 건 아닌데, 보통의 음식점들과는 이용 방법이 다른데 따로 안내가 없다보니 그냥 헤매다 나오고 말았었다. 막상 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데 말이다.

가게에 들어가서, 가능하다면 빈 테이블 하나를 잡아놓고, 다양한 맥주 탭이 늘어선 카운터에서 메뉴판을 보고 바텐더에게 주문하고 바로 계산하면 그만이다. 테이블을 잡은 경우, 어느 테이블인지를 주문할 때 따로 알려주면 된다. 맥주는 카운터에서 바로 받아오면 되고, 음식은 준비되면 테이블로 서빙해준다.

주문은 섀퍼드 파이(Shepherd’s pie), 스테이크 버섯 파이(Steak and mushroom pie), 그리고 IPA 두 잔으로 했다. (£42.00) 맥주는 탭에서 따라준 걸 바로 받아왔고, 파이는 사이드, 소스와 함께 테이블로 따로 서빙됐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드문드문 빈 자리가 있었는데, 파이를 서빙 받을 때 쯤에는 실내가 사람으로 꽉 차서 아주 시끌시끌해졌다. 가게 안팎에 선 채로 맥주 마시는 사람들도 많았다. 영국식 펍이 이런 분위기이구나 싶어 아주 재미있었다. 이 와중에 실내는 금연이라 담배 피우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 역시 마음에 들었다.

섀퍼드 파이는 양고기였는데, 아주 고소한 맛이 아주 좋았다. 양 냄새는 약간 있었지만, 나는 양 냄새가 너무 없으면 서운하게 느껴는 터라 오히려 반가웠다. 스테이크 버섯 파이는 패스트리 안에 넣어 익힌 장조림 같은 맛이었다. 베이스로 와인이 들어간듯 조금 시큼한 느낌도 있었다. 각각 양 냄새와 시큼함에 너무 예민하지 않다면 한국 사람 입맛에도 무난할 것 같다. 파이 하나의 양은 성인 남성 한 명이 딱 적당히 먹을 정도였다.

사이드로는 칩스와 그레이비 소스가 나왔는데, 이 그레이비 소스가 아주 좋았다. 케첩과 브라운 소스도 같이 나왔었는데, 그레이비 소스가 워낙 좋다보니 손이 잘 가질 않았다. 여기에 탭 IPA까지 곁들여지니 아주 꿀맛 같은 저녁을 즐길 수 있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18:36 (BST)

기분 좋게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이다. 이번에도 종이 트래블카드 인식 문제가 번거로워 일부러 튜브 대신 버스를 탔다. 한창 퇴근 시간대라 길이 꽤 막혔다. 그래도 가능하면 버스 타는 게 더 좋은 것 같다. 밖이 보이고, 셀룰러 데이터가 비교적 잘 터진다.

호텔에 가까워지니 불을 훤히 밝힌 펍 몇 개가 눈에 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날 스탬포드 브리지에서 첼시와 독일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Eintracht Frankfurt) 간의 유로파리그 4강 경기가 있었다. 어쩐지 동네 골목마다 첼시 유니폼 입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펍에는 ‘Chelsea Fans Only’라고 써붙여놓기도 했더라니. 내가 첼시 팬이었으면 어떻게든 경기를 보려고 동분서주했을텐데, 축구에 관심 없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비용 결산

  • 웨스트민스터 사원 £23.00 (2-for-1)
  • Osteria dell’Angolo £32.51
  • IWM 처칠 워룸 £22.00 (2-for-1)
  • Windmill Mayfair £42.00
  • 합계 £1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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