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밴쿠버 여행기 (5-9 Jun; 3박 5일)

여행의 이유

이번 여행은 아주 충동적으로 질렀다. 때는 새 회사로 좋은 대우를 받고 이직한 후 반 년이 좀 지난 시점인 올 봄 어느날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관행과 관습, 관성들로 가득찬 새 회사의 업무 프로세스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던데다, 역시 어느 회사든 피해갈 수 없는, 사람으로 인한 홧병이 극에 달한 어느날이었다.

마침 법정교육이 있어 회사 교육장에 앉아있었던 참이었다. 문득 창 밖으로 보이는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이 너무나도 처연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지금 내가 뭘 하고 있지.’ 회의감 가득했던 시기였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때 문득 얼마 전에 만났던 친구가 생각났다. 몇 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아내와 밴쿠버로 간 대학 동기이자 첫 직장 입사 동기였다. 집안일 때문에 잠시 한국에 들어온 김에 만나 밥을 먹었던 터였다. 최근 밴쿠버에서 집을 샀는데 거기 딸린 게스트룸을 내줄테니 밴쿠버로 놀러오라는 권유가 있었다.

교육장에 앉은 채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밴쿠버에 놀러가도 되겠냐고. 괜찮단다. 집에서 재워줄테니 숙소도 잡지 말고 오란다. 친구 아내도 괜찮다고 했단다. 바로 그 자리에서 인천발 밴쿠버행 항공권을 결제했다. 교육은 아직 진행 중이었다.

그렇게 이번 여행은 충동적으로 결정됐다. 직장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한 도피성이었다. 이 여행을 간다고 해서 내가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줄어들 리 없음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에는 어디로든 무작정 가고 싶었다. 필사적이었다. 캐나다까지 왕복하는데 걸리는 금전적, 시간적 비용에 비해 턱 없이 짧은 3박 5일 일정의 밴쿠버 여행은 그렇게 확정됐다.

여행 준비

항공권


항공권은 가격 비교 사이트 두어 군데를 대충 검색해서 골랐다. 일정에 여유가 없어 직항 항공권을 샀다. 인천-밴쿠버 직항은 대한항공(18:50 출발)과 에어캐나다(15:30 출발) 두 편이 있다. 나는 출발하는 날 휴가를 쓰지 않고 오전 근무만 한 후 바로 공항으로 갈 생각이었다. 이 과정에서 혹시나 돌발상황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서 출발이 늦은 대한항공으로 골랐다.

숙소

성수기에 접어든 밴쿠버의 숙박비는 정말 비쌌다. 나는 여행할 때 숙박비로 하루 $100 정도를 기준으로 삼는 편이다. 근데 밴쿠버 다운타운에 있는 호텔에 묵으려면 하루 $200을 훌쩍 넘겼다. $100 초반에 맞추려면 랭글리, 코퀴틀럼, 리치먼드 같은 광역권으로 나가야 했다.

다행히 이번 여행은 숙박비가 들지 않았다. 밴쿠버로 초대해준 친구가 집에서 재워준 덕분에 많은 여행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다. 대신 까다롭기로 유명한 캐나다의 입국심사 직전까지 여행 계획을 증명하기 어려울까봐 노심초사했었다. 다행히 별 일 없이 무사히 입국할 수 있었다.

여행 계획

일정이 짧다보니 여행계획도 단순해졌다. 밴쿠버에서 좀 더 나가면 빅토리아, 휘슬러 같은 유명 관광지가 더 있지만 이번 여행은 일정이 짧아 밴쿠버 도심 위주의 일정을 짰다.

원래 여행 일정을 짜던 방법대로 대강의 일정을 짰을 때는 박물관과 아쿠아리움에서 시간을 꽤 보낼 계획이었다. 이후 친구의 검수(?)를 거쳐 최종 일정은 아래와 같이 정했다.

1일차

  • 오전: 밴쿠버 도착
  • 오후: 키칠라노 비치 – 그랜빌 아일랜드

2일차

  • 오전: 스탠리 파크
  • 오후: 밴쿠버 다운타운 (잉글리시베이 비치, 차이나타운, 가스타운 등)

3일차

  • 오전: 카필라노 서스펜션 브릿지 파크
  • 오후: 린 캐년 파크

4일차

  • 오전: 쇼핑
  • 오후: 출국

실제로는 쇼핑 욕구가 없어 4일차 오전이 휴식으로 대체된 것, 저녁에 친구가 웨스트밴쿠버와 딥 코브에 데려다 줘서 계획에 없던 구경을 더 한 것 말고는 모두가 계획대로 이루어졌다. 새로운 곳에 가면 항상 박물관을 찾는데 밴쿠버 박물관을 못가본 것 정도가 아쉬움으로 남았다.

밴쿠버는 걷는 경험이 기분 좋은 도시였다. 덕분에 여행 내내 걷고 또 걸었다. 2일차와 3일차에는 각각 5만보 이상 걸었다. 힘들었지만 나는 여행을 고행처럼 하는 타입이라 오히려 좋았다.

여행 비용

밴쿠버는 북미에서도 물가 비싸기로 손꼽히는 도시라고 한다. 막상 다녀보니 서울보다 비싼 것도 있지만 싼 것도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그리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행자로서 비싸다고 느낄 수 있는 건 숙박비, 교통비, 세금과 팁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성수기의 다운타운 숙박비는 일 평균 $200를 넘나든다. 하루 교통비를 DayPass로 해결한다고 보면, 내가 밴쿠버에 있을 당시 $10.25, 이 글을 쓰는 지금은 $10.50이니 대중교통만 타고 다녀도 대충 하루 만 원씩이고 렌트를 하면 더 든다. 소비세도 품목마다 차이가 있지만 한국보다 세율이 높고, 팁의 존재는 외식 물가를 더욱 올린다.

다만, 내 경우에는 지출이 꽤 적었다. 밴쿠버에 있었던 3박 4일 동안 쓴 돈이 $120 정도고 eTA 신청 수수료와 면세점에서 쓴 돈까지 합쳐도 한화로는 20만원이 채 안됐다. 캐나다 물가를 감안하면 아주 저렴하게 놀다 온 셈이다.

숙박을 친구집에 얹혀 해결한 게 결정적이었다. 식사는 주로 테이크아웃, 한국계나 서버가 없는 식당에서 해결해서 팁 줄 일이 없었다. 유일하게 팁을 준 건 펍에서 맛있는 로컬 맥주 추천해준 바텐더 정도. 밴쿠버 다운타운 위주의 여행이었기에 다른 교통편이나 렌트카도 필요 없었고, 카필라노 서스펜션 브릿지($56.55) 말고는 딱히 입장료를 낼 곳도 없었다.

여행 짐싸기



여행 짐 역시 평소 하던대로 준비했다. 원래는 20L 짜리 메신저백을 가지고 가려고 했는데, 게스트룸을 흔쾌히 내어 준 친구에게 전해줄 선물(윗쪽 사진의 박스) 때문에 35L 백팩을 골랐다. 선물은 액체류가 포함되어 있어 따로 박스 포장해서 위탁 수화물로 보냈고, 그 외는 모두 기내 반입했다.

평소에는 항상 기내 수화물만 가지고 여행하는 편이라 오랜만에 수화물을 위탁 보내봤다. 캐나다에 도착했을 때 입국심사 대기줄이 너무 길어 위탁 수화물은 이미 한참 전에 나와있었다. 덕분에 짐 기다리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돌아올 때는 평소처럼 모든 짐을 기내 반입했고 인천에 도착하자마자 빠르게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밴쿠버의 여름은 한국의 봄 날씨 정도에 비가 자주 온다고 해서 옷도 그에 맞게 준비했다. 일정이 3박 5일 밖에 안 되어 속옷과 양말은 매일 갈아입을 수 있을 정도, 그 외는 셔츠만 한 벌 더 여분으로 챙겼다. 여기에 메리노울 후드 집업과 윈드브레이커 재킷을 챙겼다.

여행 일정 중 트래킹이 있어 신발은 경등산화를 신고 갔다. 비가 잦아서 산길이 진흙탕이 된 구간도 있어 운동화 신고 갔으면 곤란했을 상황도 있었다. 다행히 등산화 덕분에 트래킹을 무난히 마칠 수 있었다. 슬리퍼도 따로 챙겨갔는데 친구집은 완전 한국식이라 쓸모가 없었다.

여행 후기

캐나다 입국심사


캐나다를 비롯한 영미권 국가들의 입국심사는 악명 높다. 미국과 영국에 무비자로 입국했던 경험이 이미 있었지만 이번만은 좀 걱정이 됐다. 입국심사 때 출국편 항공권과 함께 나오는 단골 질문인 호텔 예약을 증빙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입국심사 때 친구집에서 지낼거라고 했더니 기분탓인지 입국심사관의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짐을 느꼈다. 다행히 이후 질문에 대답을 잘 했는지 서류 제시 요구나 추가 심사 없이 무사히 입국심사대를 통과할 수 있었다.

밴쿠버

여행 일정이 짧아 밴쿠버의 많은 부분을 둘러보지는 못 했다. 다운타운 주변과 노스밴쿠버 일부만을 본 정도였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밴쿠버는 현대적으로 잘 꾸며진 시가지 바로 곁에 펼쳐진 광활하고 때묻지 않은 자연 환경이 좋아보였다. 특히 화창하고 시원한 대륙 서안 고위도 지역의 여름에 왔기 때문에 더욱 그래보였다.


이번 여행 중 제일 좋았던 곳은 린 캐년 파크였다. 판타지 소설에서 튀어나온듯 울창한 온대 우림을 잘 정비된 산책로를 따라 거니는 망중한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평일 오후에 간 덕인지 인적도 적어 조용하고 고요한 분위기도 좋았다. 만약 다시 밴쿠버에 간다면 이번 여행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산에서 산책하고 명상하는데 쓰고 싶을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카필라노 서스펜션 브릿지 파크는 잘 꾸며놓았지만 역시 사람 손을 너무 많이 탄데다 사람이 너무 많아 어수선했다. 스탠리 파크는 산과 바다, 도시를 한번에 즐길 수 있는 멋진 도심 공원이었지만 그 이상의 특별함은 느끼지 못 했다. 밴쿠버의 다운타운은 전형적인 북미 대도시다보니 구대륙에서 느낄 수 있는 역사성은 다소 부족했던 것 같다.

밴쿠버는 꽤 고위도(북위 49도)에 위치한 곳이다. 그래서인지 한국보다도 해가 훨씬 길었고, 햇살도 훨씬 눈부셨다. 맑은 날은 물론이고 흐린 날에도 선글라스를 쓰지 않으면 한국에서보다 눈에서 느껴지는 피로감이 더했다. 밴쿠버에는 편광 선글라스를 갖고 갔는데, 주로 수변에서 보냈던 시간이 길었다보니 효과가 좋았다.

밴쿠버는 북미 도시치고는 도심 대중교통이 꽤 괜찮았다. 환승이 무료인데다 도심에 가까운 곳들은 대중교통만으로도 충분히 오갈 수 있었다. 버스나 전철도 깔끔하고 이용하기 쉬웠다.

밴쿠버는 상대적으로 아프리카계가 적은 대신, 아시아계의 비율이 무척 높아보였다. 지금까지 여행 다니면서도 노골적인 인종 차별을 당해본 적이 별로 없긴 했지만 밴쿠버에서도 별 부담 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 2020년 COVID-19 이후 아시아계에 대한 혐오범죄가 늘고 있어 주의 필요)

여행을 마치며


이번 밴쿠버 여행은 말 그대로 도피성 여행이었다. 밴쿠버에 갔다오고 나서도 한동안 업무적 압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아서 힘든 시기가 꽤 오래 이어졌다.

그럼에도 밴쿠버에서의 며칠은 피곤한 일상으로부터 확실히 분리되어 지친 심신에 확실한 휴식을 줄 수 있었다. 여행 기간 동안 특별한 결심이나 미래 계획 따위를 세우지는 않았다. 대신 아무 생각 없이 서늘하고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바닷가와 숲속을 걷는 시간 자체가 좋았다.

밴쿠버에서는 후각, 청각으로 느껴지는 자극들이 하나 같이 기분 좋았다. 미세먼지 걱정 없이 깨끗한 공기가 그랬고, 윈드브레이커 후드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발 아래로 자갈이 밟히는 소리도 그랬다. 어딜 가도 자동차와 사람으로 넘쳐나는 서울 도심에서는 느껴보기 힘든 순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것도 기분 좋았다.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나눴던 시간이 즐거웠고, 새 집의 방 한 칸을 기꺼이 내준 것, 밴쿠버 여행에 대한 조언들, 식당 추천, 혼자라면 가보기 힘들었을 곳에 자동차로 데려다 준 것 모두가 고마웠다.


2019 캐나다 밴쿠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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