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년필을 다시 써보려고 파이롯트 캡리스 데시모 F닙을 샀다. 산 김에 처음으로 필통털이라는 걸 해보기로 했다.
지금은 잘 안 쓰는 필기구들이다. 하지만 이 중 많은 수가 내 삶의 어느 한 구간은 주력 필기구를 차지했던 것들이기도 하다. 잠깐 쓰고 말았던 것들은 판매, 나눔, 또는 폐기했지만 이들만은 계속 남겨두게 됐다.
제일 왼쪽은 파버카스텔 퍼펙트펜슬 홀더에 스테들러 노리스 연필. 취준생 시절 공부할 때 리갈패드에 연필을 주로 썼었다. 리갈패드에 필기를 한 다음 뜯어서 과목 별로 클립해두는 식이었다. 필기량도 무척 많았는데 그럴 땐 역시 연필이 최고였다. 원래 파버카스텔의 카스텔 9000을 주로 썼는데 심이 단단해서 잘 부러지지 않았다.
그러다 연필, 지우개, 연필깎이, 연필캡, 연필깍지를 전부 챙기는 게 귀찮아 산 게 퍼펙트펜슬과 노리스다. 그래도 여분 연필에 연필캡은 있어야 했지만 필통 안이 훨씬 깔끔해질 수 있었다. 퍼펙트펜슬은 연필깍지로서는 좀 무겁고, 내장된 연필깎이가 약해 조심해서 써야 한다는 게 단점이다. 노리스는 공부용 연필로서는 무난했지만 지우개가 제대로 된 물건 대비 좀 아쉽긴 했다.
두 번째는 파버카스텔 TK9400 홀더 펜슬. 연필 깎기 귀찮아서 샀다. 파버카스텔 TK9071 2mm B 홀더심과 유니 휴대용 심연기를 같이 썼었다. 심연기는 엄지손톱만해서 휴대가 편했고, 나무부분 없이 심만 갈아내니 찌꺼기가 훨씬 적게 나와 좋았다. 역시 취준생 시절 주로 썼다.
세 번째는 파커 조터 샤프, 0.5mm다. 군대 전역 때 지원대장님이 선물로 주셨다. 역시 취준생 때 많이 썼다. 자리 잡고 공부할 때야 연필이 주력이었지만 잠깐잠깐 쓸 때는 샤프가 편해서 쭉 갖고 다녔다. 다만 취업하고부터는 볼펜에 밀려 연필과 샤프는 잘 쓰지 않게 됐다. 업무노트에 흑연이 번지는 게 별로였기 때문.
네 번째는 유니 쿠루토가 어드밴스 업그레이드 샤프, 0.5mm. 사진 속 필기구 중 최신품이다. 동작 메커니즘이 공돌이의 피를 끓어오르게 해서 사긴 샀는데, 나는 업무용으로는 샤프를 안 쓰니 손에 쥘 일이 많지 않았다. 저중심에 펀칭그립, 쿠루토가 치고 유격이 적은 편이라 내가 학생이었으면 주력이 됐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다섯 번째는 펜텔 그래프 1000 샤프, 0.3mm. 내 고등학교부터 대학 시절까지 주력 필기구였다. 샤프 자체도 비싸서 명절 용돈으로 겨우 사고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저중심에 준수한 그립, 노크시 심배출이 일정한 좋은 샤프였다. 덕분에 강한 필압으로 깨알 같은 글씨를 쓰던 시절, 0.3mm 샤프심도 잘 부러뜨리지 않고 쓸 수 있었다.
다만 원래 쓰던 그래프 1000은 여러 번 이사를 겪으며 분실하고 말았다. 지금 있는 샤프는 2017년에 추억 보정으로 재구입한 물건이다. 이미 샤프를 잘 안 쓰게 된 시기라 실사용은 거의 하지 않았다.
중간에 볼펜이 있어야 할 것 같지만 내 필통에 볼펜은 한 자루도 없다. 학생 때는 볼펜을 거의 쓰지 않았다. 지우개로 지울 수 없다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회사 생활하면서는 앞서 쓴 것처럼 업무노트를 깔끔히 유지할 요량으로 볼펜을 썼지만 볼펜 대부분이일회용이라 정이 든 물건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오래 썼던 볼펜은 유니 퓨어몰트 제트스트림 4+1 멀티펜이었다. 특히 검은색 볼펜은 유니 스타일핏 브라운블랙 0.38mm 심을 잘라 넣어 썼었다. 퓨어몰트의 나무그립은 미끄러웠지만 오래 쓰니 손때로 반질반질해져서 정이 들었다. 근데 배럴에 자꾸 금이 가서 새 멀티펜을 사서 그립만 원래 것으로 갈아가며 썼었는데 싼 멀티펜도 아니다 보니 현타 와서 그만두게 됐다.
이후로는 만년필이다. 만년필에 관심을 가진 건 회사에서 우연히 한 선배가 만년필을 쓰는 걸 보고부터다. 볼펜에는 연필 쓸 때의 사각거림이나 연필 깎을 때 올라오는 고소한 나무냄새 같은 감성이 없었다. 감성 찾는 걸 보니 확실히 쪼들렸던 학생 시절과는 달리 먹고 살만 해진 시기였고, 또 어른의 상징 같았던 만년필을 한 자루 써봐도 괜찮겠다 싶은 시기였기도 했던 것 같다. 감성을 쫓아 나도 만년필을 쓰기 시작했다.
여섯 번째이자 첫 만년필은 세일러 영 프로피트, EF닙. 2012년 구입. 사실 그 전에 누구나 거쳐가는 라미 사파리 EF닙도 한 자루 샀었는데 세필을 선호하는 내 취향에 너무 두껍고 그립이 내 손에 맞지 않아 금새 처분했다. 대신 얌전하고 얇은 원형 그립에 얇게 나오는 일본 브랜드 EF닙을 찾다 고른 만년필이다. 하지만, 만년필 초보자의 손에서 과도한 필압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운명하셨다. 닙 교정을 받아 살려낸 후 몇 년 더 썼지만 잉크 흐름 유지가 어려워 결국 봉인했다.
일곱 번째는 파이롯트 프레라, M닙. 2015년 구입. 만년필은 태필이지 싶어 호기롭게 M닙으로 주문했었다. 막상 써보니 그렇게 두꺼운 것도 아니었다는 게 함정. 매일 일기 쓸 때 주로 썼는데 EF닙보다 흐름이 좋아서 이로시즈쿠 치쿠린 같은 밝은색 잉크의 농담을 감상하다 보면 자연스레 힐링되곤 했다. 뚜껑을 열고 닫을 때의 미묘한 압력감도 좋았다. 뚜껑을 뒤에 안 꽂으면 내 손에 아슬아슬하게 짧은 길이, 용량이 작아 자주 채워야 했던 파이롯트의 컨버터 정도가 불만사항.
여덟 번째는 파이롯트 캡리스 데시모, M닙. 2019년 구입. 업무 중에도 예쁜 잉크 보며 힐링하고 싶은데 사무실에서는 만년필 뚜껑이 번거로워 노크식인 데시모를 샀다. 그립부에 클립이 있어 괜찮을까 싶었는데 써보니 놀랍게도 괜찮았다. 노크식을 쓰니 너무 편해서 다시는 뚜껑 있는 만년필은 못 쓰겠다 싶을 정도였다. 단점은 클릭음이 시끄러워서 조용한 회의 중엔 조심해야 했다. 캡리스 LS나 페르모는 회전식이라 조용하긴 한데 어느 세월에 그거 돌리고 앉아있나 싶어 아직은 대안이 없다.
이후 2022년에 이직을 하면서 한동안 만년필을 쓰지 못 했다. 새 사무실은 핫데스크 시스템이라 잉크병이니 주사기니 하는 물건들을 둘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년필을 못 쓰는데 복면사과니 미도리니 하는 노트를 쓰기가 너무 아까워서 업무노트와 일기를 아이패드 기반의 디지털 도구(옴니포커스, 노션, 옵시디언, 굿노트)로 바꿔버렸다. 감성이 없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다 최근 문제의식을 느꼈다. 디지털 도구는 특히 검색과 보관이 편리하긴 하지만 간단히 생각을 정리하거나 자유로운 양식으로 뭔가를 끄적이기에는 적당치 않았다. 그래서 2년 만에 탄조 노트커버와 미도리 노트를 다시 꺼냈다. 여기에 이전에 쓰면서 불편했던 점 하나를 보완하기로 했다. 파이롯트의 M닙은 6.5mm 간격의 줄노트 쓰기에는 적당했지만 5.0mm 간격의 모눈노트에는 좀 두꺼웠다. 그래서 데시모 F닙 만년필을 한 자루 더 추가로 들였다.
원래 쓰던 M닙 다크그레이는 암만 봐도 다크그레이가 아닐 뿐더러 판매페이지와도 색이 다르다. 새로 산 F닙 펄화이트는 그나마 기대와 비슷했다. 쨍하게 하얗다기 보다는 옅은 상아색 같은 느낌이다. 이염이 될지 어떨지는 써봐야 알겠지만 우선은 예쁘다.
당장 채울 잉크가 없어서 동봉된 검은색 카트리지를 끼우고 짧게 시필을 해봤다. 종이는 미도리 MD 방안 노트. 생각보다 얇게 나와서 놀랐다. M닙보다야 당연히 얇지만 차이가 많이 나서 EF닙 아닌가 싶어 다시 확인을 했을 정도였다. 어쨌든 5mm 모눈에도 큰 무리 없이 글씨를 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