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끝나고 스탭롤이 올라가는 동안 곰곰이 생각해봤다. 이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머리 속에 여러 생각이 맴돌았지만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아침 조조 영화를 보고 나온 후 한나절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글의 개요조차 잘 써지지 않아 이번 글은 의식의 흐름에 내맡겨볼까 한다.
이 영화를 굳이, 대충, 거칠게 정리해보면 두 개의 큰 줄기로 나뉜다. 정치-경제-사회 체제에 내재된 극심한 불평등과 모순이 결국 조커와 같은 괴물을 탄생시켰다는 사회적 줄기 하나, 그리고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위해 줄곧 억압해오던 자아를 해방시키고 나서야 고통에서 벗어나 그토록 바라던 행복을 자유로이 만끽할 수 있게 된 인간상이라는 개인적 줄기 하나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조커는 배트맨의 안티테제 역할을 수행하는 캐릭터다. 배트맨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고담 시티를 수호하는 영웅이다. 아무리 썩어 문드러졌을지라도 고담 시티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묵묵히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그에 반해, 조커는 무질서와 파괴의 상징이다. 조커에게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란 중요치 않다. 대신, 내면에 가득찬 욕망을 외부 세계를 향해 최대한 발산하고 투사함으로써 ‘존재함’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영화 <조커>는 괴팍하며 목적을 알 수 없는 캐릭터인 조커가 탄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그리고 아서 플렉이 조커로 변해가고 각성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불평등한 사회 속에서 억압 받는 자들의 군상과 그들이 마침내 봉기하는 모습은 작중에서 중요한 장치이자 배경으로 활용된다. 다만 그들의 싸움은 더욱 평등하고 공정하며 진보된 체제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맹목적인 폭력성만을 드러낼 뿐이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폭력, 방화, 약탈만 남는다.
그런 폭력을 영화 <조커>는 옹호한다. 다른 사람들이 붙여놓은 정신병자라는 딱지를 떼어내고 자신만의 선악의 기준을 발견한 바로 그 순간, 조커는 평생 그토록 원했던 지고의 행복을 맛본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의 분위기는 어두운 비극에서 밝은 희극으로 급전환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분명 비극임에도 극히 유쾌하게 표현된다. 선악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순간을 코미디로서 희화화해버렸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선악의 경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선을 넘어가도 좋다’고 속삭이는 훌륭한 그린라이트다. 조커가 족쇄를 풀어내고 각성하는 바로 그 장면에서 나 역시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차마 드러내지 못 하는 억압된 욕망과 좌절의 경험은 이 사회를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세계는 고담 시티라는 허구의 공간이지만 영화의 훌륭한 완성도 덕분에 극도의 현실감을 뿜어낸다. 계층 간의 격차와 사회적 갈등, 인물들의 감정선 역시 마찬가지라 자칫 과몰입하기 쉬울 정도다. 너무나도 훌륭해서 오히려 거리를 두고 봐야 하는 영화, 그게 바로 <조커>였다.
(2019년 10월 3일 목요일 오전 – CGV영등포 스피어X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