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읽고

나는 불가지론에 가까운 무신론자다. 세상 살다 고달픈 일을 만났을 때, 의지할 신이 없다보니 고통을 덜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봤다. 그중 가장 효과가 좋았던 방법은 명상이었다. 특히 호흡 명상을 익히고부터는 과거에 대한 후회과 미래에 대한 걱정을 덜 하는 대신 현재에 집중하는 습관을 조금씩 들여갈 수 있었다.

명상의 효과를 보면서 자연히 불교에도 관심이 생겼다. 조계종 사찰에 신도 등록을 하고서 기초교리 수업을 수강하고, 경전 강의와 법회에 참석하며 종종 전각에 앉아 나름대로의 수행도 했다. 예전에 다녔던 기독교에서는 믿음을 통한 구원을 구하는 데 반해 스스로 노력해서 깨달음을 얻으면 현세의 괴로움을 소멸시킬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사찰 출입이 잦아질수록 위화감이 점점 커져갔다. 불교 사상의 핵심은 항상 변하기 마련인 일체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정작 절은 온갖 기복신앙적 요소가 가득하다. 사찰 달력에는 ‘새해소원성취’, ‘삼재업장소멸’, ‘대학원만합격’ 등 명목을 내건 행사가 매일 같이 열린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내걸린 연등이나 산더미 같은 기왓장마다 적힌 내용은 세속적 안녕에 대한 염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법회 말미마다 돈 낸 사람들 명단 읽어주는 모습에서 느낀 실망도 컸다. 수행 대신 불보살 신앙에 의지하는 것 역시 잠시간의 위안을 제공할 뿐 붓다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꼈다.

그래서 초기 불교의 가르침은 어땠는지에 대해 가볍게 읽어볼 요량으로 이 책, <사성제: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골랐다. 현대 불교에 대해 내가 실망한 부분들은 불교에 대한 오랜 탄압과 대중화 과정에서 덧붙여진 것이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또 초기 불교 경전을 바탕으로 불교의 핵심 교의인 사성제에 대해 알아보면 현재의 괴로움을 떨쳐내는 데 도움될만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사성제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의 단 네 글자로도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사성제를 구성하는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는 단 몇 줄로는 쉬이 요약할 수 없을만큼 복잡한 종교철학적 근거를 갖고 있다. 이 책은 초기 불교 경전인 니까야를 중심으로 어째서 사성제가 진리인지에 대한 논리를 쌓아간다. 그 과정에서 불교 교리의 핵심 체계가 자연히 드러난다. 때문에 불교의 주요 개념인 오온, 십이처, 삼독(탐진치), 삼학(계정해), 팔정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읽기 쉽다.

책에서 많은 분량을 할당해 설명하는 개념은 연기다. 다만 나는 연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특히 연기의 일부인 윤회가 그렇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으면 현생에서도 괴로움을 소멸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렇다면 현생의 괴로움을 소멸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수행해야 할 이유는 충분한데 굳이 존재가 불분명하며 허황되게 다가오는 윤회를 왜 받아들여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당시 인도 철학에서 윤회는 너무나도 당연한 믿음이라 자연스레 불교에 흘러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대중에게는 존재론과 인식론을 망라한 형이상학보다 “‘나무관세음보살’만 외면 극락왕생”이라는 쪽이 훨씬 쉽게 와닿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윤회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십이연기의 흐름에도 구멍이 생긴다. 의식과 존재는 맞닿아 있으므로 의식이 없으면 존재가 없고 반대로 존재가 없으면 의식이 없다. 때문에 존재나 의식의 근거가 되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연기의 고리가 이어질 수 있다. 그런데 윤회가 전제되지 않으면 연기의 고리는 여기서 끊기고 만다. 윤회의 대안이 될 수 있는 개념에 대해 고민해봤지만 부족한 나로서는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다만 윤회를 부정하더라도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데 큰 지장이 없어보인다. 윤회를 포함한 십이연기는 불교의 중요한 교리이기는 하지만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핵심 개념을 지지하는 기둥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책 전반에 걸쳐 붓다께서도 현학적인 논의에 함몰되는 대신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주안점을 두었다는 내용이 여러 번 언급된다.

사성제는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가르침이므로 관념적인 이론이나 사상과는 달리 괴로움의 소멸에 직접 도움이 되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항상 사성제에 주안점을 두고 법을 설하셨지 괴로움의 소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현학적인 이론이나 단순한 지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세속적인 가르침에 대하여는 거의 설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이론이나 사상은 탐욕을 버리게 하거나, 최상의 지혜를 얻게 하거나, 깨달음을 얻어 괴로움을 소멸하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4장 ‘사성제’ 중)

그럼에도 책 내용 중 상당 부분이 형이상학적 설명이기도 했다. 출판사의 책 소개에는 교리적 설명을 최소화했다고 하지만 아무리 실천적 내용을 중심이더라도 책이라는 매체 특성상 실천을 위한 이론적 설명이 많아질 수 밖에 없겠다. 게다가 니까야가 그렇듯이 비슷한 내용이 책 전반에 걸쳐 계속 반복된다. 덕분에 책을 읽기보다는 장기간에 걸쳐 조금씩 나누어 설해진 법문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단멸론에 대한 설명은 생각해볼 거리였다. 비록 나는 윤회를 믿지 않지만 그렇다고 단멸론을 믿는 것도 아니다. 단멸론을 믿는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굳이 괴롭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없으므로 즉시 목숨을 버리는 쪽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굳이 죽음과 윤회까지 가지 않더라도 당장 현생에서 괴로움이 없는 행복을 얻을 방법이 있다. 누구에게나 현생에서의 행복의 가능성이 열려있는데 이를 스스로 포기하는 일은 어리석을 수 밖에 없겠다.

호흡 명상에 집중하다 보면 모든 생각이 사라져 머리 속이 고요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 고요함이 좋아서 모든 생각을 억누르는데 온 정신을 쏟기도 했다. 하지만 명상 중의 고요함에 집착하다 보면 명상이 끝나자마자 또 명상 속의 고요함이 그리워 현재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지기 일쑤였다. 대신 명상 중일 때나 아닐 때나 떠오르는 생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며 이 생각은 어떤 조건에 따라 생겼는지, 이 생각이 영원한 것인지 아니면 무상한 것인지에 대한 통찰을 얻는 방법을 이 책을 통해 접한 결과 명상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공부하는 계기가 됐다.

재가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가르침도 얻었다. 모든 소유물을 아낌 없이 보시하고 출가하는 일은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좋은 일이지만 이를 실제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보다 계를 잘 지키면서 얻은 재물은 가지되 그에 집착하지 않는 중도의 자세라면 쉽지는 않지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재물 뿐만 아니라 일, 인간관계 등 삶의 모든 측면에 똑같이 적용할 수 있겠다.

초기 불교 경전의 핵심 가르침인 법, 연기, 사성제에 대해 비교적 쉽게 풀어주는 이 책을 통해 불교 사상의 근본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는 재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책에서 얘기하는 내용 모두에 공감할 수는 없었다. 사실 남들이 옳다는 가르침을 무조건 따르지 말라는 것 역시 붓다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붓다의 가르침 중 스스로 납득할 수 있었던 부분을 명상 중에나 일상 생활 중에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많은 부분을 조금 더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불교 뿐만 아니라 세상의 수많은 오랜 가르침을 조금씩 배우고 실천하여 체득하면 삶의 고통을 조금씩이라도 덜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성제를 이해한 수행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한마디로 ‘불가능한 일은 포기하고, 가능한 일에 최선을 다해 노력하라’라고 정리할 수 있다. (…) 존재로 계속 태어나 윤회하면서 괴로움의 소멸, 즉 완전한 행복을 실현하는 일은 불가능하므로 그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포기해야 한다. 반면에 존재로 태어나지 않음으로써 윤회에서 벗어나 괴로움의 소멸, 즉 완전한 행복을 실현하는 일은 가능하므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나가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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